비상계엄 사태 후폭풍이 정부가 1년 내내 추진한 밸류업(가치 제고) 정책에도 찬물을 뿌리는 모양새다. 정부는 기업의 다음 연도 사업계획이 나오는 12월이 되면 밸류업 공시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달 들어 지금까지 밸류업 공시를 낸 상장사는 5곳에 불과하다. 이 5개사 중 금융당국이 밸류업 필참을 원하는 대형주는 없었다. 기업들은 정책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언했다가 국회 의결로 해제한 직후인 12월 4일 오전 서울 명동 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코스닥 지수,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 연합뉴스

12일 한국거래소 기업공시정보시스템(KIND)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달 3일 밤부터 11일까지 밸류업 계획을 자율공시했거나 공시를 예고(안내공시)한 상장사는 총 5곳이다. 코스피 상장사 2곳, 코스닥 상장사 3곳이다. 코스피 기업 2곳 중 코스피200에 속한 종목은 국책은행인 기업은행(024110) 하나뿐이다. 주요 민간 대기업 공시는 멈춘 상태다.

지난달 같은 기간(11월 3~11일) 밸류업 공시를 낸 상장사는 9곳이었다. 9개사 모두 KT(030200), 현대백화점(069960), LG이노텍(011070), KT&G(033780), 한미사이언스(008930) 등 코스피 대형주였다. 꼭 같은 기간으로 비교하지 않더라도 계엄 사태 직전까지는 기아(000270), SK하이닉스(000660), 롯데지주(004990), 카카오뱅크(323410), LG(003550)그룹 주요 계열사, 현대모비스(012330) 등의 대형주가 속속 공시하며 밸류업 분위기를 달구는 듯했다.

한국거래소도 주요 대기업 상당수가 내년도 사업 방향이 잡히는 12월부터 밸류업 공시를 쏟아낼 것으로 기대해왔다. 정지헌 한국거래소 상무는 지난달 28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대한민국 주식시장 활성화 태스크포스(TF)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최근 시장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밸류업 공시에 나서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며 “연말까지 100여개 기업이 (밸류업 공시에)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12월 시작과 함께 전혀 예기치 못한 비상계엄 사태가 경제·사회·정치 곳곳에 충격을 안겼다.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과 함께 현 정부가 추진해온 밸류업 정책도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이런 우려는 계엄 선언 이후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금융주 주가 급락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일러스트=챗GPT 달리3

주요 상장사들은 밸류업 공시를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주주 친화는 모든 상장사의 숙제여서 (탄핵 여부와 무관하게) 밸류업 자체는 계속 신경 쓸 것”이라면서도 “다만 정책 불확실성이 너무 큰 이런 때에는 돌아가는 분위기부터 살피는 게 순서라고 본다”고 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도 “밸류업 공시를 준비 중이긴 하나 당장 낼 계획은 없고, 상황을 좀 더 볼 것”이라고 했다.

밸류업 정책 표류 기미가 강해지자 금융당국은 다급해졌다. 이달 10일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20개 외국계 금융사 관계자를 만나 “시장 안정을 위한 정부의 준비 태세는 확고히 유지되고 있다”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연착륙, 기업 밸류업, 자본시장 선진화 등 주요 정책 과제도 일정대로 차질 없이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앞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이달 6일 블룸버그TV에 출연해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모두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지지하고 있다”며 “탄핵이나 정권 교체, 정치적 불안 상황과는 상관없이 밸류업 프로그램은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