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투자자들 사이에서 ‘미국 주식 불패’가 신념처럼 굳어지는 분위기다. 미 증시가 경기 둔화 우려와 인공지능(AI) 거품론 등의 악재성 재료에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어서다. 변변치 않은 한국 증시 움직임에 실망한 개미로선 해외로 더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문제는 밸류에이션(가치 대비 주가 수준)을 계산하는 지표로만 봤을 때는 미 증시가 너무 비싼 상태라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불패 신화까지 만들어 맹목적으로 미 증시를 추종하기엔 지표가 보내는 메시지가 심상치 않다고 말한다. 일각에선 낡은 평가 지표가 기업 가치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무용론도 제기된다.
◇ S&P500 PER 21배… 역대 세 번째로 비싸
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11월 현재 미국 주식시장(S&P500 기준)의 주가수익비율(PER)은 21배 수준이다. 가장 대표적인 밸류에이션 측정 지표로 꼽히는 PER은 시가총액을 순이익으로 나눈 값이다. 수치가 낮을수록 저평가됐다는 뜻이다.
DB금융투자(016610)에 따르면 PER 21배는 미 증시의 지난 40년 역사에서 세 번째로 높은 수치다. 가장 비쌌던 때는 2000년대 초반 IT(정보기술) 버블 붕괴 직전이다. 당시 S&P500 PER은 25배였다. 2020년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이 터지고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펼치던 시기가 두 번째(PER 22배)로 비쌌다.
강현기 DB금융투자 연구원은 미 예일대 경제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쉴러 박사가 개발한 밸류에이션 지표 ‘CAPE’로도 미 주식시장의 밸류에이션을 측정했다. CAPE는 과거 10년간 주당순이익(EPS)을 현재 가치로 할증해 PER을 계산하는 개념이다. 기본적으론 PER과 유사한데, 여기에 물가와 시간 가치를 반영한 점이 특징이다.
CAPE로 계산해도 미 증시는 지난 154년 중 세 번째로 비싼 상태라는 게 강 연구원의 분석이다. 그는 “CAPE로 본 현재 미 증시의 고평가 수준은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 발발 직전 ‘광란의 20년대’라 불리던 시기보다 높다”고 했다.
◇ 고평가 우려에도 “美 주식만이 희망”
가치 측정 지표는 “미국 증시에 뛰어들기 부담스럽다”고 경고하지만, 개인 투자자의 미국 주식 신봉은 날로 굳건해지는 분위기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3분기 해외주식 거래대금은 191조1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88% 급증했다. 오르비스투자자문에 따르면 올해 10월 24일 기준 미국 상장지수펀드(ETF)에 우리나라 개인 투자자 자금 9조3607억원이 유입했다. 작년(7271억원)보다 13배 많은 규모다.
강현기 연구원은 “미국 주식에 투자하면 잠깐은 주가가 떨어질 수 있지만, 결국엔 더 오른다는 믿음이 생긴 것”이라며 “물론 처음부터 이런 믿음이 있지는 않았을 테고, 미국 기업들의 탄탄한 펀더멘털(기초체력)에 매력을 느끼고 투자하다 보니 그 결과가 주가에 투영된 것”이라고 했다.
증권가에서는 그러나 밸류에이션 측정 지표가 기업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가령 PER은 주가를 EPS로 나눈 수익성 지표인데, EPS는 해당연도 또는 다음 해 전망치를 사용하다 보니 기업 성장성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는 지적이 과거부터 있었다.
이경수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테슬라 PER이 180배에 달하던 10여년 전에는 증권업계 누구도 이 회사 주식을 사라고 적극 추천하지 않았다”며 “그런데 현시점에서 보면 미 증시 상승을 이끄는 주체가 테슬라와 같은 IT 기반 혁신 기업이지 않느냐”고 했다. 이 센터장은 “회계장부에 기반한 보수적 수치로 고평가 우려를 논하기엔 낡은 지표가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