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이 140조원 규모로 빠르게 성장했으나 자산운용사들은 보수 인하 출혈 경쟁에 속병을 앓고 있다. 이름만 다르고 구성 종목은 비슷한 상품을 서로 베껴 출시한다는 비판이 많은 상황에서 차별화 포인트를 저보수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에는 일부 힘 있는 운용사 위주로 ETF 시장이 정리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여기에 ETF 시장으로 유입된 자금이 해외 증시 등 국내 주식 외의 상품으로 몰린다는 사실도 말 못 할 고민거리로 꼽힌다. ETF를 통해 국내 투자금이 해외 증시로 계속 빠져나가면 한국 주식시장의 경쟁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다.
◇ 시장 파이 커졌지만… 돈 번 ETF 사업부 4곳뿐
1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ETF 시장의 순자산총액(AUM)은 이달 9일 기준 142조원을 넘어섰다. 우리 자본시장에 ETF가 처음 출시된 2002년 3440억원에 불과했던 AUM은 매년 30%씩 증가하며 고속 성장을 이뤘다. 국내에 상장된 ETF 개수는 현재 857개에 달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성과와 달리 ETF 시장 속을 들여다보면 상당수 운용사는 웃지 못하고 있다. 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26개 운용사 ETF 사업부 가운데 올해 1분기 손익분기점(BEP)을 넘긴 운용사는 삼성자산운용·미래에셋자산운용·한국투자신탁운용·KB자산운용 등 대형사 네 곳에 불과하다.
업계 관계자들은 운용사들이 앞다퉈 운용보수 인하에 나서는 현실을 ‘풍요 속 빈곤’의 주된 배경으로 꼽는다. 과거에는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려는 중소형사가 주로 저보수 마케팅을 펼쳤는데, 최근 들어서는 업계 1·2위 사업자인 삼성운용과 미래에셋운용마저 치킨게임에 뛰어들었다.
삼성운용은 지난달 19일 미국 대표 지수를 추종하는 ETF 4종의 총보수를 연 0.05%에서 0.0099%로 낮춘다고 밝혔다. 그러자 미래에셋운용은 이달 9일 ‘TIGER 1년은행양도성예금증서액티브(합성) ETF’의 총보수를 연 0.0098%로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모두 업계 최저 수준이다. 이 두 운용사의 AUM 규모는 전체 ETF 시장의 76%다.
투자자 입장에서 ETF 보수 인하는 반가운 일이다. 포장만 다를 뿐 구성 종목은 대동소이한 ETF 상품이 넘쳐나는 국내 시장에서 보수 수준은 투자자에게 상품 선택의 중요한 고려사항일 수밖에 없어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조만간 중소형 운용사들은 보수가 높아도 자금이 유입될 정도로 차별성 있는 상품을 기획하거나 ETF 사업을 접거나 한쪽을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美 증시로 흘러가는 ETF 유입 자금
전문가들은 ETF 시장으로 들어오는 자금이 국내 주식이 아닌 해외 자산을 기초로 하는 상품에 쏠리는 현상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오를만하면 한 번씩 확 주저앉는 우리나라 증시에 답답함을 느낀 투자자들이 ETF를 통해 해외 투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는데, 이런 현상이 국내 증시 경쟁력을 점점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다.
펀드평가사 KG제로인에 따르면 5월 3일 기준 국내 주식형 ETF 설정액은 34조7872억원으로 3개월 전과 비교해 6261억원 줄었다. 반면 해외 주식형 ETF 설정액은 같은 기간 2조9507억원 증가했다. 또 최근 3개월간 개인의 순매수 ETF 상위 10개 중 9개는 한국이 아닌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상품으로 집계됐다.
박윤철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ETF로 유입된 자금이 다시 자국 증시로 흘러가는 선순환 관계를 구축한 미국 자본시장과 달리 한국 ETF 시장은 국내 주식형 상품의 성장세가 더딘 상황”이라며 “국내 ETF 시장 자체는 성장하고 있지만, ETF로 유입된 자금이 해외 증시로 몰리면서 국내 ETF 시장과 국내 주식시장이 경쟁 관계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박 연구원은 “개인 투자자의 ETF 선호 현상이 계속 이어진다면 국내 증시에서 개인 수급의 이탈이 가팔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