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이 프랑스의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직에 올랐을 때, 한국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그의 ‘혈통’에 주목했다. 생후 6개월 만에 프랑스에 입양된 여성이 그 나라 내각의 일원이 됐다는 출세담은 뿌리를 중요시하는 우리 민족 정서를 한껏 들뜨게 했다. 펠르랭에 대해 다룬 기사에도 ‘한국계 입양아’라는 수식어가 절대 빠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펠르랭이 한국계라는 사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가 10년 간 프랑스 정계와 경제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입양아’ 외에도 여러 수식어를 얻었기 때문이다.
지금 펠르랭의 이름에는 주로 ‘벤처 투자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2016년 파리에서 벤처캐피털(VC) 코렐리아캐피탈을 창업한 이래 유럽 스타트업계의 큰손으로 활약해왔다. 네이버와 라인으로부터 1억유로씩 총 2억유로를 출자 받아 1호 펀드를 결성, 총 6개 스타트업을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원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으로 키워냈다.
지난달 2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펠르랭 대표를 만났다. 서울 사무소를 총괄하는 대표(피에르 주 파트너)가 따로 있음에도 서울에 직접 자주 방문한다는 그는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해 높은 이해도를 자랑했다. 한국 스타트업의 강점과 약점,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1호 펀드의 투자 성과는.
“K펀드 1호는 2017년 초 2억유로 규모로 결성됐다. 실제로 매출을 내고 있고 수익화가 임박한 후기 스타트업에 투자해 해외 진출과 사업 확장을 돕는 스케일업 펀드다. 17개 스타트업에 직접 지분투자를 단행했고, 20개 회사에는 (다른 펀드에 출자하는 방식으로) 간접 투자했다. 초기 기업에 주로 투자하는 다른 VC의 펀드에 출자함으로써 우리의 네트워크가 부족한 북유럽, 동유럽 스타트업들에 간접적으로 지분 투자를 단행한 셈이다.
지금 시장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포트폴리오사들 모두 안정적인 재무 구조를 갖추고 있어 심각한 위기에 처한 회사가 한 곳도 없다. 회복 탄력성이 높은 섹터에 속한 회사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포트폴리오사들의 성장한 기업가치를 반영한 펀드의 현재 크기(운용자산)가 4억유로에 달한다.
1호 펀드의 대표적인 포트폴리오로는 최근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중고 명품 거래 플랫폼 베스티에르콜렉티브(Vestiaire Collective)가 있다. ‘스페인의 당근마켓’으로 불리는 왈라팝(Wallapop) 역시 1호 펀드에서 투자한 대표적인 스타트업이다. 유럽 전역에서 성공적인 실적을 내고 있다.
1호 펀드는 아직 청산하지 않았는데, 3배 이상으로 엑시트하는 것이 목표다. 후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펀드이기 때문에 초기 스타트업용 펀드처럼 수익률이 높지는 않으나 원금을 모두 잃을 위험은 거의 없다. K펀드2도 이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2호 펀드 결성 현황은.
“전체 목표 금액(2억5000만~3억유로)의 절반이 조금 넘는 1억5000만유로를 모으고 1차 클로징을 한 상태다. 결성이 최종 완료되는 시점은 내년이지만, 이미 1차 클로징을 했기 때문에 지분 투자가 가능하다. 이로써 회사에서 운용 중인 펀드의 전체 AUM이 5억5000만유로로 불어났다.
2호 펀드도 1호 펀드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성장하는 유럽의 기술 스타트업들에 투자할 것이다. 다른 펀드에 출자하는 방식의 간접 투자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도 이뤄질 것이다. 모태펀드 운용 기관 한국벤처투자로부터 500만유로를 출자 받기로 했기 때문에 그 2배인 1000만유로 이상을 한국 기업에 투자해야 한다. 약정액의 10%(2500만~3000만유로)까지는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 가능하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어 신이 난다. 한국 시장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지난 10년 간 서울에 굉장히 많이 왔는데, 그때마다 기술 스타트업 생태계의 빠른 발전과 진화를 목격했다. 여러 분야에서 유니콘도 많이 탄생했다. 최근 눈에 띄는 변화는 많은 창업자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좋은 경험을 쌓고 모국에 돌아와 역동적인 벤처 생태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도 한국 벤처 생태계에 투자할 좋은 기회들이 많을 것이다. 밸류에이션(기업가치 대비 주가 수준)도 미국 스타트업들보다 합리적인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어떤 분야의 스타트업이 경쟁력 있다고 보는지.
“인공지능(AI), 웹(Web)3.0, 메타버스(가상세계), 블록체인 분야에서 특히 경쟁력을 가졌다고 본다. 해당 분야의 한국 스타트업들을 많이 살펴보고 있다.”
-한국 스타트업들이 B2C 커머스 플랫폼 쪽에만 지나치게 집중돼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 소비재 시장이 새로운 콘셉트를 상대적으로 빨리 받아들여 발전시켰기 때문에, B2C 사업에 뛰어드는 창업가도 많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 대기업이 많은 기능을 내재화하는 경향이 있어, 사스(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업체) 등 외부의 서비스 공급사와 계약을 맺고 일하는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 B2B 스타트업이 발달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화가 한국에서도 점차 변하고 있으며, 대기업 등을 상대로 B2B 서비스를 영위하는 스타트업들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 비교할 때 한국 스타트업이 지닌 차별점은.
“메타버스, 웹3.0뿐 아니라 AI 등 기술 전반이 유럽 스타트업들보다 더 발전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정부의 인센티브 덕에 지난 10년 간 수많은 벤처 펀드가 결성되고 스타트업에 많은 돈이 투입됐음에도 VC 산업은 아직 덜 성숙한 것 같다.”
-유럽 스타트업은 어떤 섹터가 가장 발달했나.
“지난 몇 년 간 파리와 런던은 물론 체코 등 동유럽, 그리고 북유럽까지 유럽 전역에서 매우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이 크게 성장하며 ‘창업 붐’이 일었다. B2C 커머스 플랫폼부터 핀테크까지 굉장히 광범위하다. 프랑스에만 국한한다면, 최근 훌륭한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이 투자를 많이 받았다. 프랑스는 헬스케어 분야의 R&D 및 공공연구가 매우 발달했고 생물학과 의학 분야에 강한 나라다.
또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푸드테크 스타트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헬스케어는 질병을 해결하고 생존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산업이며, 푸드테크는 지구와 자연환경을 위해 지속가능한 먹거리를 연구한다. 둘 다 경제적 리스크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분야인 만큼, 앞으로 더욱 역동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한국과 유럽 스타트업들 사이에서 교두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유럽 시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이 어떤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나.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한국인들의 이른바 ‘빨리빨리’ 문화 덕인지 스타트업도 더 민첩하고 피봇(pivot·스타트업이 신제품을 출시한 후 시장 반응을 보고 다른 사업 모델로 전환하는 것)도 유연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의 기술 스타트업 중 아직 유럽에서 성공한 회사가 많지 않다. 반대로 유럽의 기술 스타트업이 한국이나 아시아에서 성공한 사례도 별로 없다. 코렐리아캐피탈이 앞으로 한국과 유럽 스타트업들 사이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싶다.”
-네이버의 스타트업 육성 정책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투자한 중고 거래 플랫폼 왈라팝의 경우 원래 검색 엔진의 퀄리티가 낮았는데, 검색 엔진은 물론 인터넷 쇼핑 분야에서도 훌륭한 기술력을 가진 네이버 덕에 품질이 훨씬 높아졌다. 네이버는 이처럼 풍부한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스타트업을 위해 가치를 창출해낸다.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들과 협력할 줄 안다는 게 네이버의 큰 강점이다. 네이버 스스로가 스타트업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이 신생 기업들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다. 네이버와 함께 일하면서, 우리도 스타트업들에 조언하고 그들과 더 잘 협력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반대로 우리가 네이버의 투자나 M&A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2017년 네이버가 프랑스 그르노블에 있는 제록스리서치센터(현 네이버랩스유럽)를 인수할 때, 내가 계약이 성사될 수 있도록 제록스측을 직접 설득한 적이 있다.”
-올해 초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커머스 플랫폼을 유망하게 본다고 말했는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 궁금하다.
“(지난해 벤처 투자 활황 속에서) 이커머스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이 지나치게 높아지긴 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여전히 유망하다고 본다. 특히 중고 거래 플랫폼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으로 확신한다. 한국보다 유럽에서 발전 속도가 더 빠를 것이다. 유럽인들은 중고품을 사용하는 데 있어 동양인들보다 거부감이 덜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이커머스 사업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탈리아나 독일 같은 유럽 일부 국가들의 이커머스는 아시아와 비교하면 아직 걸음마 단계다.”
-프랑스에서도 이커머스가 별로 발달하지 않은 것 같은데.
“프랑스에서는 꽤 발달했으나 아직 한계가 있다. 어제 한 럭셔리 브랜드 관계자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소매 전략만 신경 쓰고 이커머스는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메타버스 같은 신기술과 쇼핑의 접목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고 했다. 전통적인 럭셔리 브랜드들도 이제는 커머스를 디지털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 창업자들과 어떻게 교류하는지.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창업자가 있다면.
“마켓컬리 운영사 ‘컬리’의 김슬아 대표, 최근 만난 클래스101 창업팀이 기억에 남는다. 나이는 굉장히 젊지만 전략과 비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이퍼커넥트를 창업해 성공적으로 매각한 안상일 대표도 인상 깊은 CEO였다. 그들의 성공담은 후배 창업가들에게 굉장한 영감과 자극을 주며, 롤모델로서 창업 생태계에 꼭 필요한 요소다.
다만 김슬아 대표 같은 여성 창업가가 더 많았으면 한다. 한국에는 성공한 여성 창업가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는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나는 후기 스타트업들을 주로 만나는데, 여성 창업가는 10명 중 1명 밖에 안 된다. 기술 분야 스타트업의 경우 여성 창업가의 비율이 특히 낮다.”
-유럽에서는 스타트업의 성비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지.
“그래도 다행히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성비 불균형이 잘못됐으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기업의 주주들이 나서서 이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한다.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펀드가 약정액의 25% 이상을 여성 창업가나 CEO가 이끄는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서약한 상태다. 프랑스 은행들도 각 기업의 ESG 정책이 무엇인지, 젠더와 다양성 문제를 해소할 방안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묻고 있다. 성 평등 문제에 있어 사회 전반적으로 굉장히 강한 공감대와 규약이 형성돼있는 것이다.”
-투자를 결정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벤처 투자는 과학적 공식이 있는 업이 아니기 때문에 명확한 기준이 있지는 않으나,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견디고 위기에 대처하는 창업가의 능력을 가늠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을 알아보고 투자 여부를 결정하려면 직감과 경험에 의존해야만 한다.
또 지금 같은 위기에는 어떤 섹터가 회복력이 있으며 위기 이후에 더 강해질 수 있는지 명확히 판단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어떤 스타트업이 투자를 더 받지 않아도 비용을 잘 통제하고 관리해 살아남을 수 있을지 판단해야 한다.”
-지금 같은 위기에는 각 섹터의 1등 기업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승자독식’을 한 빅테크 기업이지만, 경우에 따라 2등 기업에 투자하는 게 더 유리할 수 있다. 1등 회사는 많은 정부 규제나 노동법의 타깃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세계 1위 차량 공유 업체 우버가 대표적인 예다. 반면 2등 기업에 투자하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추이를 살펴보며 시간을 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