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발(發) 환율 리스크가 글로벌 주식시장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고강도 긴축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파운드화의 가치 급락이 새로운 금융위기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른바 ‘킹달러’(미 달러화의 초강세) 현상이 심화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국 증시의 변동성이 지금보다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28일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54.57포인트(2.45%) 급락한 2169.29로 마감했다. 코스피지수가 종가 기준 2200선 아래로 무너진 것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악화한 2020년 7월 20일(2198.20) 이후 2년 2개월 만이다. 코스닥지수는 24.24포인트(3.47%) 하락한 673.87에 거래를 마쳤다. 홍콩(3.41%), 대만(2.61%) 등 아시아 주요국 증시도 일제히 낙폭을 키웠다.
미 연준의 강도 높은 금리 인상으로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파운드화의 가치 급락이 유럽의 금융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겹치면서 증시 투자 심리는 얼어붙었다. 사실상 글로벌 준기축통화로 간주되는 파운드화의 가치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하락하면서, 이미 초강세를 지속해온 달러화의 상대적 가치가 한층 더 높아졌다.
28일 영국 파운드화의 미 달러화 대비 환율은 1파운드당 1.06달러선에서 움직였다. 역대 최저치인 1.03달러까지 떨어졌던 26일보다는 소폭 반등했지만, 파운드화와 달러화의 가치가 같아지는 ‘1파운드=1달러(패리티·parity)’가 깨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올해 초만 해도 1.3달러 수준을 유지하던 파운드·달러 환율은 하반기 들어 본격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은 강달러에 기름을 붓고 있다. 28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18.4원 오른(원화 가치는 하락) 1439.9원으로 마감했다. 이는 2009년 3월 16일(1440원) 이후 13년 6개월 만의 최고치다. 환율은 장중 한때 20원 넘게 치솟으며 1442.2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환율이 지난 22일 1400원을 돌파한 후 고공 행진을 이어가자,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국내 주식의 순매도를 이어가는 상황이다.
파운드화 쇼크를 야기한 건 영국 정부가 발표한 50년 만의 최대 규모 감세 정책이다. 지난 23일(현지 시각) 리즈 트러스 내각은 가계 및 기업 부담을 덜어 경기를 부양한다는 취지로 450억 파운드(한화 약 69조원) 규모의 감세 정책을 내놓았다. 소득세 최고세율을 45%에서 40%로 내리고, 19%에서 25%로 법인세를 올리려던 계획을 철회하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시장에선 이번 감세 정책이 영국 정부의 재정 적자를 악화하고 인플레이션을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비쳤고, 투자자들은 파운드화를 대거 매도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와 중앙은행(BOE)의 엇박자가 정책 신뢰도를 떨어트린다는 지적도 나왔다. BOE는 물가를 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긴축 기조를 내비치고 있지만, 재무부에서는 반대로 돈을 푸는 정책을 내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구(IMF)와 경제학자들은 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서로 상충되는 정책을 내놓는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IMF는 27일(현지 시각) 성명을 통해 “영국의 높은 물가 상승 압력을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 대규모 재정 지출을 권하지 않는다”며 “재정과 통화 정책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작동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2008년 금융위기를 예측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파운드화 가치 폭락을 경고하기도 했다.
국내외 증권가에서는 당분간 파운드화 쇼크 후폭풍으로 인한 달러화 강세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신흥국 증시는 환율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미국의 금리 인상 사이클과 더불어 파운드화 및 달러화 가치의 흐름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달러화 초강세가 촉발할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를 거듭 내비쳤다. 연말 달러 대비 파운드화 환율 전망치를 1달러로 하향 조정하며 ‘1파운드=1달러’선에 도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노무라증권은 파운드화 환율이 11월 말에 1달러선을 밑돌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연말 파운드화 환율 전망치는 1달러에 못 미치는 0.975달러로 제시됐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파운드화 급락을 우려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달러화에 미칠 악영향 때문”이라며 “달러 초강세는 궁극적으로 글로벌 금융 시장과 경제에 또 다른 위기를 야기할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가능성은 낮다고 하지만 비관적 환율 전망을 근거로 하면 달러화 지수는 2001년 고점 수준을 경신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시장의 우려가 커지자 전날 BOE가 혼란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긴급 국채 매입에 나서긴 했지만, 임시 방편에 불과하다는 평가에 무게가 실린다. BOE는 다음 달 14일까지 장기 국채를 매입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이다. 매 입찰마다 50억 파운드(약 7조8000억원) 한도로 매입하고, 향후 시장 상황에 따라 조건은 변경될 수 있다고 밝혔다. BOE의 긴급 조치에 시장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기는 했지만, 재무부가 감세안을 수정해 시장 신뢰를 회복하지 않는 이상 이마저도 단기 미봉책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일혁 KB증권 연구원은 “정부가 내놓은 감세안을 재무장관과 함께 떠나보내는 것이 영국 정부가 시장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라며 “BOE의 시장 안정화 대책이 시행되는 기간은 2주 반에 불과하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이번에 금융 시장에 문제가 생긴 근본적인 원인은 감세안에 있다”며 “BOE의 긴급 개입을 보면서 시장이 혼란스러워지면 연준이 정책 기조를 바꿀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오기도 하나,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박경민 DB금융투자 연구원은 “BOE의 강력한 추가 긴축 신호가 있어야만 시장 공포가 진정될 것”이라며 “보다 조속한 세원 마련과 BOE의 강력한 금리 인상 등 즉각적인 조치가 시급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종빈 메리츠증권 연구원도 “11월까지 인플레이션 압력이 지속되는 상황에 추가 단기 조치 없이 장기 계획안에 그칠 경우, 위기에 대한 우려는 다시 확대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