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틱인베스트먼트는 국내 메이저 사모펀드(PEF) 운용사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벤처캐피털(VC)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 첫번째 벤처 열풍이 불었던 1999년 도용환 회장이 ‘스틱IT벤처투자’라는 이름으로 설립했으며, 이후 2006년 PEF 운용사로 거듭나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렸다. 1분기 기준 운용자산(AUM)이 4조3000억원에 달하며 현재 2조원대 중반의 블라인드 펀드를 추가로 결성 중이다.
숫자만큼 투자한 회사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지난해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 투자로 원금 대비 9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고, 일진머티리얼즈·한화시스템·유비케어·HK이노엔 등에 베팅해 ‘벤처 투자 명가’의 명성을 PE업계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곽동걸 부회장은 스틱인베스트먼트가 첫걸음을 뗄 때부터 합류한 원년 멤버다. 동서증권과 삼성증권을 거쳐 1999년 스틱투자자문 대표를 맡았고, 2010년 스틱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가 됐다. 올해 1월부터는 부회장 직함을 달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대치동 스틱인베스트먼트 본사에서 곽 부회장을 만났다. 그는 현재 국내 PE와 기업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증시가 침체되고 기업가치가 줄줄이 하락하는 현 상황을 놓고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암울한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곽 부회장은 그 외에도 최근 사모대출(PD) 시장에 진출한 일과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한 배경, 1000억원을 투자한 음악 저작권 플랫폼 뮤직카우를 둘러싼 논란과 우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올 초부터 증시가 급락해 기업가치가 많이 떨어지고 있다.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또 언제쯤 개선될 것이라 보는지 궁금하다.
“지정학적 리스크에 기후 리스크, 미·중 갈등과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치며 앞으로 매크로 환경이 어떻게 변할 지 속단하기 어려워졌다. 우리도 혼란스러워서 내부적으로 토론을 많이 하고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매크로 환경에 대한 얘기를 듣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제 시작인 것 같다. 단순히 기업가치의 거품이 꺼지는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PE들이 작년부터 재작년 사이 바이아웃한 회사 중 몇 곳은 높은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주가 수준)에 잘못 인수한 꼴이 됐다. 고밸류에이션에 잘못 투자한 경우, 시장이 바닥을 찍고 턴어라운드(반등)하기까지 꽤 오랜 기간이 걸린다. 이들에게는 괴로운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 바이아웃에 불리한 시기라고 보는지.
“우리뿐 아니라 다른 PE들도 특별한 경우 아니면 바이아웃을 중단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바이아웃 시장 경색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공제회 같은 출자자(LP)들의 자금난이다. 내가 자본시장에서 수십년 일해왔지만, 공제회에 자금이 떨어진 것은 거의 처음 보는 듯하다. 많은 공제회들이 회원 대출로 많은 돈을 쓰고 있다. 재작년부터 PEF에 약정을 많이 해둬 운용사(GP)의 캐피탈콜(출자금 납입 요청)에 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신규 출자가 거의 어려운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신생 GP들이 공제회로부터 출자를 받지 못해 딜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프로젝트 펀드 규모가 200억~300억원 수준이라면 저축은행이나 캐피탈사에서 30억~50억원씩 모아 조성할 수 있지만, 500억원이 넘어가면 주요 공제회 등 연기금이 메인 출자자(앵커 LP)로 들어와야만 한다. 결국 자금력이 있는 다른 GP를 찾아가 “실사 비용만 주고 (딜을) 다 가져가라”고 제안하는 PE들도 있을 정도다.”
-과거의 경험에 비춰볼 때, 시장이 한 번 휘청이면 회복되기까지 보통 얼마나 걸리나.
“과거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큰 대미지(충격)가 한 번 오면 V자로 반등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을 때도 증시가 붕괴됐다가 1999년부터 V자로 반등했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에도 1~2년 만에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다만 이번에도 그 때와 비슷하게 회복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세계화가 끝났다는 얘기를 많이들 하지 않나. 지금 우리는 탈세계화 단계의 초입에 서 있다. 그동안은 한국에서 중간재를 만들어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에서 물건을 싸게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등 글로벌 분업 체계가 잘 갖춰졌으나, 이제는 미·중 갈등과 러시아 전쟁 등 지정학적 이슈 때문에 그런 체계가 깨지고 있다. 탈세계화가 본격화한다면 나라 간 관세가 높아지고 글로벌 분업 체계가 블록 단위로 바뀌게 된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비용이 높아지고 회복까지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특히 어떤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까.
“플랫폼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회사들이 특히 어려울 수 있다. 플랫폼 기업들은 투자자의 돈으로 시장을 만들고 엄청난 적자를 보면서 마케팅을 해왔고, 소비자들도 거기에 익숙해진 상태다. 그런데 이제 외부 자금 조달이 안되면 난감한 일들이 생길 것이다. 플랫폼 기업들 사이에서 이합집산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기업이 시장을 장악할 것이다.”
-PE들이 올해 낮은 가격에라도 엑시트를 하는 게 낫다고 보는지.
“지금이라도 엑시트를 하면 좋겠지만, 다들 움츠러든 상황에서 쉽지 않을 것이다. 이합집산되는 과정에서 살아남아 시장을 장악할 수 있는 회사라면 돈을 더 넣고 버티는 게 맞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손해를 보고서라도 엑시트를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작년 10월 자본시장법이 개정되며 경영참여형 PE도 사모대출펀드(PDF)나 사모신용펀드(PCF)를 운용할 수 있게 됐다. 몇 개 운용사들이 법 개정에 앞서 발 빠르게 크레딧 펀드를 출범했는데, 스틱인베스트먼트는 올해 4월에야 관련 사업본부를 신설했다. 상대적으로 좀 늦은 감이 있는데.
“우리도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게 결국 사람(인재 채용)의 문제이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다.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시장인 만큼 앞으로 누가 어떤 딜을 어떻게 잘 잡아서 커가느냐가 관건이지, 먼저 시작했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PDF 시장이 계속 커지고 있다. 은행의 대출 규제가 심해질 수록 은행 대신 PE가 뛰어들어 해결해주는 사례가 앞으로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스틱인베스트먼트의 크레딧 펀드는 주로 어떤 방식으로 운용될지 궁금하다.
“대기업 소수지분 투자가 전략적으로 옳은 방향이다. 금액이 어느 정도 되면서도 다운사이드 프로텍션(하방 안전장치)이 있으며 메자닌(주식과 채권의 중간 성격을 지닌 금융 상품으로, 전환사채(CB)·신주인수권부사채(BW)·교환사채(EB) 등을 포함한다) 구조를 만들려면, 대기업이 백업을 해주는 모델이 좋다.
대기업 입장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투자를 받는 것이 지분 희석을 방지하고 자본적지출(CAPEX)을 집행하는데 더 유리하다. 향후 회사가 더 성장할 경우 자신들(대주주)이 가져갈 수 있는 몫이 더 커질 수 있다. 우리 같은 GP 입장에서는 트랙레코드를 많이 쌓아둬 블라인드 펀드를 만들어야만 향후 더 많은 딜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대체투자 전문 스틱얼터너티브를 자회사로 두고 있는데, 향후 크레딧 부문과의 합병 가능성도 있는지.
“별도 법인으로 운영할 것이다. 앞서 벤처캐피털(VC)을 스틱벤처스로 스핀오프했는데, 왜 그랬겠나. 자산의 리스크·리턴(위험·수익) 프로파일이 서로 다르니 별도 법인으로 운영해야 의사 결정을 훨씬 더 신속하게 할 수 있다. 크레딧 사업본부도 AUM이 어느 정도 확대되면 분사할 것이다.”
-지난해 모회사 디피씨와의 합병으로 상장사가 됐다. 상장사가 됨으로써 번거로운 일이 늘었을 것 같은데.
“거버넌스 구조를 잘 갖춰나갈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좋은 일이다. 칼라일그룹이나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등 글로벌 사모펀드 운용사들도 상장돼있다. 앞으로 더 많은 기관 투자자들이 우리 회사 지분을 장기 보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전체 지분의 40% 이상을 연기금이나 기관 투자자들이 장기 보유하게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PE는 성장해나가는 산업에 선제적으로 투자하는 펀드를 운용한다. 시장 평균 대비 훨씬 더 뛰어난 투자 성과를 올리는 경우가 많다. PEF의 타깃 수익률이 보통 20~25% 정도다. 우리 같은 PEF 운용사의 주주가 된다면 높은 성장성에 간접적으로 투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향후 사내유보금이 계속 쌓이면 주주환원 측면에서 자사주를 더 사거나 배당을 할 계획이 있다. 지금 우리 회사 자기자본이 2300억원 정도다. 앞으로 이익이 나면 계속 자기자본이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주주환원 여력도 더 커질 것으로 본다.”
-현재 운용 중인 펀드의 내부수익률(IRR)이 어느 정도인가.
“하이브 등에 투자한 스페셜시츄에이션펀드1호(SSF펀드1호)의 IRR이 약 24%로 추산된다. 남아 있는 포트폴리오를 원금만 회수한다고 보수적으로 가정할 때의 IRR이다. 이 포트폴리오에서 원금을 모두 잃는다 가정해도 IRR 20%가 넘는다. SSF펀드2호의 경우 지금까지 전체 AUM의 80% 정도가 소진되고 2000억원이 남았는데, 일진머티리얼즈와 뮤직카우 등 좋은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어 수익률이 매우 좋을 것으로 예상한다.
현재 2조원 넘는 규모의 3호 블라인드 펀드를 결성 중이다. 국민연금의 수시 출자를 받을 예정이며, 그 외에 교직원공제회와 우정사업본부 등이 LP로 들어왔다.”
-최근 증권선물위원회에서 뮤직카우의 저작권료 참여 청구권을 ‘증권’으로 규정하며 한 차례 논란이 되지 않았나. 뮤직카우의 사업성은 여전히 높게 보고 있는지.
“음원이 발매되고 나면 처음에는 저작권료 수입이 많이 발생하다 인기가 식으면 수입이 확 줄어든다. 뮤직카우는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저작권료가 얼마나 줄어드는지 통계적으로 예측해 안정적인 수익률을 유지한다. 뿐만 아니라 옥션(경매) 형식으로 음원을 거래하도록 한다. 어떤 사람들은 팬심(心)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수익에 대한 기대 심리로 응찰한다. 파편화된 하나의 증권인 셈이다. 암호화폐를 거래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콘텐츠가 있다.
이번에 금융당국에서 문제 삼은 부분은 저작권이 투명하게 관리될 수 있느냐였고,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키움증권과 하나은행을 수탁사로 지정했다. 시스템을 갖추는데 워낙 큰 돈이 들어가는 만큼(스틱인베스트먼트는 뮤직카우에 1000억원을 투자했다) 이 시장은 후발주자가 뛰어들기 상당히 어려운 영역이 됐다.”
-음원뿐 아니라 미술품에도 조각 투자를 많이 하는데, 이 시장은 어떻게 보는지.
“음원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으면 현금 흐름이 계속 발생하지만, 미술품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기 전까지는 별도의 현금 흐름이 없지 않나.
반면 부동산 조각 투자 플랫폼은 앞으로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카사’ 애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아 개인적으로 소액을 투자해봤는데, 이 서비스도 임대료를 받아 분기마다 투자자에게 나눠준다. 또 신탁회사에 자산이 보관돼있어 투명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뮤직카우와 비슷하다. 만약 향후 블록체인 기술이 고도화한다면 카사나 뮤직카우 같은 서비스는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틱은 기술 분야에서 선진적인 투자 회사 아닌가. 암호화폐 산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PE가 잘할 수 있는 영역과는 거리가 멀지만, 암호화폐 수탁회사 같은 사업 모델은 괜찮은 것 같다.”
-최근 싱가포르 법인을 설립했는데, 왜 하필 싱가포르인가.
“해외 투자를 하거나 외국계 자금을 출자 받으려면 외국에 거점을 두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과거 2016년 홍콩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폐쇄한 적이 있다. 홍콩보다는 싱가포르에 법인을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싱가포르는 인도네시아와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부상하는 동남아시아 시장의 거점을 세울 만한 최적의 나라다.”
-동남아시아 1위 차량 공유 업체 그랩에 2억달러(약 2400억원)를 투자했는데, 여기는 사정이 어떤지. 엑시트 계획도 있나.
“투자 당시와 비교해 기업가치가 떨어졌다. 그래도 순현금을 70억달러(약 9조7000억원) 보유한 회사이고 실적 지표가 우상향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에서 디지털은행 사업 인가도 받은 만큼,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일부 사업 부문은 흑자로 전환하기도 했다.
아직 펀드 만기도 많이 남아 있고 더 성장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향후 2~3년은 엑시트하지 않고 더 지켜봐도 될 것 같다. 그랩은 이미 동남아에서 슈퍼앱(별도의 앱을 설치하지 않고 단일 앱 안에서 여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