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남부 항구 도시 마리우폴이다. 마리우폴은 개전 초기부터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80일가량 저항한 끝에 지난달 21일 러시아군에 함락됐다. 마리우폴의 우크라이나군 2400여명은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요새로 삼아 마지막까지 항전했지만 결국 투항했다.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유럽 최대의 제철소 중 하나로 면적은 약 10㎢에 달한다.
전쟁의 비극과는 별도로 금융투자업계와 반도체 업계에서는 철저히 파괴된 아조우스탈 제철소에 주목하고 있다. 구소련 시대에 만들어진 이 오래된 제철소가 반도체 산업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어서다.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5가지 희귀가스가 필요하다.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회로를 그려 넣는 노광(露光)이나 그려진 반도체 회로만 남기고 불필요한 부분을 부식시켜 깎아내는 식각(蝕刻) 등의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가스다. 구체적으로는 크립톤(Kr), 제논(Xe), 네온(Ne), 헬륨(He), 아르곤(Ar)이다. 모두 유독가스다. ArF(불화아르곤), KrF(불화크립톤) 등의 형태로 반도체 공정에 쓰인다.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제철 공정에서 아르곤을 제외한 4가지 가스가 모두 나오는 곳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역설적으로 오래된 제철소이기에 공정이 좋지 않아 유독가스가 많이 나오고 그게 반도체 기업들에게 필수적인 가스인 것"이라고 했다.
한국무역협회와 산업통상자원부, HDIN 리서치에 따르면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 등 한국 반도체 기업은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크립톤의 31%를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고 있다. 대부분은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생산된 가스다. 또 네온(23%), 제논(18%)도 20% 안팎을 우크라이나에서 의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에서도 국내 반도체 기업은 반도체 희귀가스를 수입한다. 제논을 31% 의존하고 있고, 크립톤(17%), 네온(5%)도 수입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아조우스탈 제철소가 파괴돼 가스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으므로 이제 우크라이나에서 희귀가스를 수입하기가 어려워졌다. 국제사회에서 지탄받는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서 희귀가스 부족 현상이 큰 문제로 떠오를 수 있다는 의미다.
이미 중국에서는 이런 반도체 희귀가스 품귀현상을 십분 활용해 가격을 올리고 있다. 지난 3월말 기준 중국산 네온가스 가격은 1㎏당 569달러였다. 지난해 평균(55.2달러)의 10배가 넘는 가격이다.
물론 국내 기업들도 반도체 희귀가스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 1월 광양제철소 산소공장에 네온 생산설비를 만들었고 올해부터 고순도 네온을 생산하고 있다. 지난 2019년말부터 반도체용 특수가스 전문기업인 TEMC와 협력해 얻은 결과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반도체 희귀가스는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러시아 또는 중국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국내 유가증권시장에서 시가총액 1위와 3위를 기록하고 있는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뿐 아니라 원익IPS(240810), LX세미콘(108320), 유진테크(084370) 등 숱한 상장회사들의 이익과 직결된다. 반도체 기업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우크라이나의 제철소가 언제 복구될지, 이 제철소에서 나오는 가스들을 다른 곳에서 어떤 식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를 관심있게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반도체 산업에 가스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