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소프트뱅크'라는 이름을 빼놓고 벤처 투자 시장을 논할 수 없게 됐다. 지난해 100조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 받으며 뉴욕 주식시장에 데뷔한 쿠팡도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약 3조7000억원을 투자 받았고, 숙박 플랫폼 기업 야놀자도 비전펀드가 2조원을 베팅하며 단숨에 몸값 10조원의 '데카콘'이 됐다.
그러나 소프트뱅크그룹은 한국 스타트업 시장에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다. 벤처캐피털(VC)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가 이미 22년 간 한국 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무수한 IT 벤처·스타트업의 구원 투수로 활약해왔다. 넥슨, 당근마켓, 데브시스터즈, 구글에 인수된 테터앤컴퍼니, '틴더' 운영사 매치그룹에 인수된 하이퍼커넥트 등이 소프트뱅크벤처스를 거쳐갔다.
2018년부터 소프트뱅크벤처스를 이끌고 있는 이준표 대표도 원래 이 회사의 투자를 받은 창업가였다. 동영상 검색 솔루션을 만드는 엔써즈를 창업해 소프트뱅크벤처스의 투자를 유치했고, 이후 회사를 KT에 매각한 뒤 2015년에는 아예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전업했다. VC 심사역으로서의 경력이 길지 않았지만, 전임자였던 문규학 전 대표가 비전펀드의 아시아투자총괄파트너가 돼 떠나며 후임으로 이 대표를 선임하자 업계에서는 "타당한 결정"이라는 평이 나왔다.
지난 달 10일, 서울 서초동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 사무실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한 이 대표는 올해 벤처 투자 시장에 대한 견해와 시각을 가감 없이 풀어냈다. 긴축 정책의 영향으로 비상장 시장도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올해는 작년과 달리 다소 보수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난해 투자 실적을 간략히 소개한다면.
"작년 한해 8611억원 규모의 벤처 펀드를 새로 결성했다. 투자 금액은 6082억원이었으며, 총 5034억원을 회수했다. 펀드 결성, 투자, 회수 금액 모두 예년과 비교해 큰폭으로 늘었다.
특히 창업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투자했던 하이퍼커넥트가 인수되면서 약 30배의 수익을 가져다줬다. 그 외에도 카카오에 매각된 웹툰 플랫폼 래디쉬를 통해 11.4배 수익을 올렸고, 최근 인도네시아 이커머스 업체 토코피디아의 프리(pre)IPO 과정에서 보유 지분 중 극히 일부를 90배 정도에 매각했다(현재 기업가치는 약 33조4000억원으로 알려졌으며, 오는 7일 상장한다). 정신없이 펀드를 만들고 투자를 해 열심히 수확한 한 해였다."
지난해 펀드는 몇 개나 결성한 것인지.
"대형 펀드 3개의 결성액이 총 6000억원에 육박한다. 국내 초기 투자용 펀드와 규모가 좀 큰 기업에 투자하는 글로벌 펀드, 중국 기업에 투자하는 펀드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몇 개의 프로젝트 펀드를 결성했다."
요즘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산업이나 섹터는.
"작년 한해 동안 인공지능(AI) 분야의 혁신적 기업들과 로보틱스를 이용한 자동화 기술을 가진 회사들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대표적인 예가 노르웨이 스타트업 아쿠아바이트다. 미국의 글로벌 VC인 NEA가 초기 투자를 한 뒤 우리가 시리즈B 투자를 리드했다. 이 회사는 AI와 로보틱스를 수산업에 적용해, 양식장에 있는 연어 수십만 마리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물 온도와 먹이를 자동으로 조절해준다. 연어 양식 시장 규모가 수조원에 달하기 때문에 아쿠아바이트도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다.
기술을 잘 활용해 시장의 트렌드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들도 눈여겨보고 있다. 특히 리셀(resell·한정판 제품을 더 높은 가격에 되파는 것) 플랫폼에 관심이 많아 한·중·일 3개국의 대표적인 리셀 업체에 모두 초기 투자했다."
3개국에서 비슷한 스타트업을 찾아내 모두 투자하는 사례는 흔치 않을 텐데.
"세 회사 모두 시리즈A 투자를 집행했다. 먼저 중국의 리셀 플랫폼 '나이스'에 투자한 데 이어 지난해 국내 1위 리셀 업체 '크림'에도 투자했고, 이후 일본에서도 비슷한 회사를 찾아냈다. 리셀 플랫폼 '스니커덩크'를 운영하는 '소다'라는 회사다. 당시 다른 기관에서 투자를 받으려고 추진 중이었는데 '우리에게 투자 받으면 아시아 넘버원이 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설득했다."
아시아 넘버원이 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주겠다고 설득한 건지 궁금하다.
"우리는 나이스와 크림에 이미 투자했기 때문에, 두 회사와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한다면 다른 회사에는 없는 자산을 갖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리셀 플랫폼에는 위조품 감별 기술이 굉장히 중요하다. 가품과 진품에 대한 빅데이터를 AI로 충분히 학습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이스와 크림, 소다가 서로의 데이터를 공유한다면 동북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까지 포함한 아시아 시장의 1등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분 투자 후 실제로 리셀 플랫폼 간 협업이 잘 이뤄지고 있나.
"크림이 원래 일본 시장에 진출하려고 했으나, 그 대신 소다에 지분 투자를 했다. 이후 우리는 소다에 한 번 더 투자했고 소다는 그 투자금으로 일본 2위 플랫폼 '모노카부'를 인수해 시장 점유율 90%를 달성했다. 한·일 최대의 '리셀 연합군'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노카부의 CEO는 지금 동남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진출한 상태다."
각 리셀 플랫폼 모두 동북아에서 활약 중이기 때문에 시장이 겹치는 문제가 발생할 것 같은데.
"우선 중국은 외국 회사가 진출하기 어렵다는 특징 때문에 한·일 업체와 시장이 겹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 회사의 경우 지분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장에서 서로 충돌할 위험이 없다. 크림이 일본 시장에 진출해 경쟁하는 대신 소다를 키워주며 협력하는 구조다. 앞으로 AI 감별을 위한 기술적 협력도 기대된다."
VC가 포트폴리오사의 지분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도해 합종연횡을 이끌어냈다는 것인데, 이런 사례가 또 있을까.
"지난 2018년 영화 등 동영상 자막을 제작하는 아이유노미디어그룹에 기관 투자자 중 최초로 240억원을 투자했다. 이 회사는 원래 국내와 동남아 시장에서 수동으로 자막을 제작하는 사업을 하다가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확대에 발맞춰 AI 기반 기술 기업으로 성장했다. 자막의 품질이 뛰어나야 콘텐츠의 시청률도 오르기 때문에, 각 나라의 문화적 코드를 딥러닝해 제대로 학습한 뒤 신속하고 정확하게 의역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 것이다.
아이유노는 결국 넷플릭스 등에서 서비스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콘텐츠를 가장 빨리 번역해낼 수 있는 스타트업으로 성장했고, 2019년 유럽 1위 자막 회사 BTI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에는 미국 최대 자막 회사 SDI까지 인수해 연 매출 6000억원이 넘는 세계 1위 자막 업체가 됐다. 우리는 이 투자 과정을 도운 후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님에게도 아이유노를 소개했다. 결국 아이유노는 비전펀드로부터 1800억원을 투자 받으며 1조원의 기업 가치를 인정 받고 '유니콘'이 됐다."
스타트업 간 글로벌 합종연횡이 시장의 트렌드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본다. VC도 이제는 단순히 좋은 회사를 찾아서 성장하기까지 기다리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손정의 회장님이 주주총회에서 '소프트뱅크는 벤처캐피털이 아니라 비전캐피털'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VC도 좀 더 능동적으로 회사의 성장을 도와주고 M&A와 지분 투자까지 이끌어내야만 한다. 투자를 받는 상대가 '내 돈'이 아닌 '나와 내 팀'을 필요로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특히 소프트뱅크벤처스는 모회사(소프트뱅크그룹)가 큰 펀드(비전펀드)를 운용하고 있고 전세계에 그룹사 및 피투자사가 많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는 인적, 기술적 자산이 많다는 장점도 있다."
소프트뱅크그룹의 네트워크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사례가 있다면.
"2017년 미국의 AI 반도체 스타트업 '미씩'을 발굴했는데, 당시 미국은 이미 VC 간 경쟁이 치열해 돈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회사에 투자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소프트뱅크그룹이 인수한 영국 반도체 설계 회사 암(ARM)이 떠오르더라. 암의 대표이사를 찾아가, 혹시 미식에 투자하게 된다면 이사회에 합류해 좀 도와달라고 부탁드렸다. 미씩이 저전력으로 고성능을 낼 수 있는 반도체 칩을 만드는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암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내 승부수가 통했고, 미씩은 우리의 투자를 받았다. 암의 대표님은 매 분기 미씩의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과거 엔비디아에서 부사장으로 재직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업계에 후배들도 많아 반도체 공정 프로세스에 관해 굉장히 많은 조언을 해주고 도움도 준다. 결국 미씩은 지난해 블랙록과 휴렛팩커드(HP) 등 글로벌 기업들로부터 7000만달러(약 850억원)의 후속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스타트업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도록 돕는 것은 이상적인 일이나, '소프트뱅크'라는 글로벌 기업 계열사가 아니라면 어렵지 않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내가 창업한 회사 엔써즈는 KT에 매각된 후 최종적으로 미국 트리뷴미디어에 재매각됐는데, 이를 위해 6개월 간 방송 기술 관련 콘퍼런스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엔써즈의 전략에 대해 꾸준히 설명하고 설득했다. 그러다보니 나를 만나주는 사람들의 직급이 점점 높아지더라. 부장급에서 이사, 부사장, 나중에는 수석부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엔써즈에는 뛰어난 네트워크를 가진 임원도 없었고, 그저 좋은 기술과 비전만 있었다."
올해 스타트업 시장이 조정을 겪으면 VC 사이의 양극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자본이 풍부한 대형사에 돈이 몰리고, 반대로 규모가 작은 VC들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VC의 규모보다도 투자자의 역량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규모가 작은 신생 VC 중에서도 지난해 급성장한 곳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암호화폐 관련 기술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해시드벤처스, 초기 투자 전문 업체 베이스인베스트먼트,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등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 않나. 성공한 초기 VC들의 공통점은 투자자가 창업자와 함께 호흡하며 비전을 같이 꿈꾸고 능동적으로 투자한다는 것이다. 창업가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나는 절대 '많이 들어본 VC'라는 이유로 투자 유치를 결심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투자사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지 명확히 이해해야만 투자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스타트업 시장의 전체적인 전망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변화를 감지하고 있긴 하다. 재작년부터 작년까지 상장한 많은 회사들의 주가가 지금 공모가를 밑돌고 있어, 당시 프리IPO 단계에 투자했던 VC들이 적잖게 고생하고 있다. 비상장사의 후기 단계 투자자들은 벌써 기업가치를 하향 조정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투자했던 회사 한 곳도 최근 후속 투자 유치를 위한 계약 체결 직전 밸류에이션을 30%나 깎였다. 상장 시장이 조정을 받으면 비상장사 가치도 뒤따라 하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년 한해 동안 결성된 벤처 펀드의 규모가 워낙 커서 투자가 크게 줄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VC와 스타트업들은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올해는 좀 더 선별적으로 투자하자고 직원들에게 얘기하고 있다. 스타트업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투자 유치를 조금 앞당기는 게 유리할 것이다. 현금 흐름을 잘 관리해 투자 유치가 어려워지더라도 향후 몇 년 동안 잘 버틸 수 있도록 미리 점검하는 것이 좋다. 플랜B, 플랜C까지 염두에 둘 것을 권한다."
VC 입장에서 '선별적 투자'의 기준은 어디에 둬야 할까.
"수익 모델이 검증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큰 회사를 눈여겨봐야 한다. 실제로 미국 VC들은 반복 매출(recurring revenue·구독 서비스 등에서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매출)이 일어나지 않는 스타트업들을 투자 대상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거래액을 늘려 외형적 성장만 해온 회사들은 작년과 달리 미래의 가치만으로 대규모 투자를 받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는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AI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왔다. 그 당시와 지금의 투자 경향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과거와 달리 고성능의 딥러닝을 위한 하드웨어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뤄졌다. 알고리즘 소프트웨어의 성능도 최적화됐으며 방대한 데이터가 축적됐다. 이제는 AI가 목적이 아닌 기술적 '수단'이 됐다. 각 분야에서 AI를 이용해 얼마나 유용하고 가치 있는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가 관건이 됐다. 따라서 VC들도 스타트업이 AI를 얼마나 잘 개발하느냐가 아닌, AI 기술을 활용해 기존 산업을 얼마나 많이 바꿀 수 있느냐를 중요하게 본다."
기술의 진보가 기존 산업 질서와 충돌하는 사례가 많지 않나.
"신기술이 기존 일자리를 없앨 수 있고, 정서·윤리적 가치관과 충돌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기술이 진보해도 사회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곤 한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엄청난 변곡점이 됐다. 사람들이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이전까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IT 스타트업의 가장 큰 허들은 이용자가 신기술을 '처음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쿠팡이츠도 한번 써본 사람이 계속 쓰고, 핀테크나 닥터나우(비대면 의료 플랫폼)도 단 한번의 첫 경험이 중요하다. 닥터나우 같은 비대면 플랫폼은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이 없었다면 정착하기까지 4~5년이 더 걸렸을 지도 모른다. 코로나19를 계기로 허들이 무너진 만큼, 향후 만약 루닛(소프트뱅크벤처스가 투자한 AI 의료 기업)과 닥터나우를 결합한다면 더 빠르고 혁신적인 원격 진료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
코로나19의 유행이 종식된다면 비대면 플랫폼들이나 메타버스(가상세계)는 쇠퇴할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비대면 서비스의 이용이 코로나19가 종식된다 해서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또 코로나19가 사라져도 다른 전염병이 정기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람들은 이제 코로나19의 유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메타버스와 실제 현실을 거의 동일시하며 살 지도 모른다.
암호화폐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현재 크립토 시장의 전체 가치가 400조~50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돈이 투입됐는데도 그만큼의 가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 같다. 아직은 암호화폐의 본질을 이해하고 투자하기보다는 투기성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많다. 이제는 실질적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회사를 잘 찾아내는 '옥석 가리기'가 중요하다고 본다. 똑똑한 사람들이 암호화폐 생태계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성공 사례가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