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권력형 사외이사'에 대한 상장사들의 선호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나 장·차관 혹은 국회의원 출신 인사 60명이 올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 혹은 감사위원 명단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재계 전문가들은 이 같은 권력형 인사들에 대해 양가적 시선을 갖고 있다.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적임자라는 긍정적 평가도 존재하는 반면, 소액주주보다는 대주주나 경영진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수기' 역할을 하는 데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그래픽=이은현

◇ 황덕남 전 靑 비서관·박재완 전 기재부장관, 2개 상장사서 동시 선임

28일 조선비즈 증권부는 유가증권·코스닥시장 상장사 2351개사의 주주총회 의안을 분석했다. 그 결과, 총 22개 상장사가 청와대 실장이나 비서관 혹은 행정관 출신 인사를, 10개 상장사가 국회의원 출신 인사를, 38개 상장사가 장·차관(급) 인사를 신임 사외이사 혹은 감사위원 후보로 추대했다(여러 직을 거쳤을 경우 중복해서 셈).

경남스틸(039240)은 염상국 전 청와대 대통령경호실장을 감사위원으로, LX하우시스(108670)는 김영주 전 청와대 경제정책수석비서관을 신임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영입했다. 와토스코리아(079000)는 신성호 전 청와대 홍보특별보좌관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그 외에 이훈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과 11명의 비서관 출신 인사가 이사진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청와대 특별감찰반장 출신 인사 2명도 신임 이사 명단에 포함됐다.

청와대 출신 인사 가운데 특히 황덕남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2개 상장사의 사외이사를 겸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은행의 사외이사 겸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상태에서 올해 롯데제과의 신임 사외이사로 영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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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출신 인사도 인기가 여전했다. 두 명의 3선 의원 출신 인사가 올해 정기주주총회를 통해 이사회에 입성했다. 제일기획은 18~20대 국회의원을 지닌 장병완 호남대 석좌교수를 영입했으며, 인바이오젠(101140)은 17~19대 국회의원이었던 박기춘 전 의원을 감사로 신규 선임했다.

삼성생명과 삼성카드는 나란히 2선 의원을 신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삼성생명은 경제부총리를 지낸 유일호 전 의원을, 삼성카드는 최재천 전 의원을 신규 선임했다.

신규 선임 사외이사가 해당 기업 대주주와 '인연'이 있는 사례도 눈에 띈다. 동일고무벨트(163560)DRB동일(004840)은 각각 민현주·박인숙 전 의원을 영입했는데, 두 사람 모두 동일고무벨트 및 DRB동일의 대주주인 김세연 전 의원과 같은 당(현 국민의힘)에서 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국회의원 출신 가운데 2개 상장사의 사외이사를 동시에 맡게 된 인물도 있다. 17대 국회의원과 기획재정부·고용노동부 장관,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등을 두루 역임한 박재완 전 장관은 올해부터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한국앤컴퍼니(000240)의 사외이사를 맡게 됐다. 박 전 장관은 이달까지 삼성전자의 사외이사 및 이사회 의장직과 롯데쇼핑 사외이사직을 겸직하기도 했다.

(왼쪽부터)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유일호 전 기획재정부 장관, 김희관 전 법무연수원장, 정승 전 농림수산식품부 차관·식약처장. /조선DB

장·차관급 고위 공무원 출신 인사도 올해 사외이사진에 대거 포진했다. 대표적으로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이 삼성생명의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그 외에 '장관' 및 '차관' 타이틀을 달았던 인사 20명이 신임 사외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장관급(검찰총장·금융위원장 등)과 차관급(법무연수원장·경찰청장·관세청장·특허청장·육군참모총장·서울특별시부시장·부산광역시장)에 해당하는 고위직을 지낸 인사까지 포함하면 총 34명으로 늘어난다.

장차관급 공무직 출신 인사 가운데 3명은 2개사의 사외이사를 동시에 맡게 됐다. 한 명은 박재완 전 장관이며, 다른 한 명은 신세계건설·한솔제지(213500)에 동시 영입된 김희관 전 법무연수원장, 마지막은 남해화학(025860)·코스맥스엔비티(222040)의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으로 선임된 정승 전 농림식품부차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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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성 갖춰 문제 안 돼" vs "경영진 목소리 대변하는 데 그쳐"

기업이 청와대 고위 공무직이나 국회의원, 장·차관 출신 인사를 선호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은 정계 인사들과 친분 관계를 갖고 있어 향후 있을지 모를 검찰 조사나 세무 조사 등 외풍으로부터 기업을 보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윤진수 기업지배구조원 사업본부장은 "고위직 출신 사외이사들 중 상당수는 특정 분야에서 높은 전문성을 갖고 있어, 소위 '로비스트'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사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김민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도 "사외이사는 전문성과 독립성에 있어 주요 기준을 충족하면 되는 자리"라며 "권력형 사외이사의 선임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위직 출신 사외이사의 선임은 현행 상법상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법 제542조의8제2항에 따르면 회사의 최대주주나 특수관계인 혹은 경영 사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요 주주가 아니라면 누구나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이 가능하다. 현직 사외이사가 과반을 차지하는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가 일정 요건을 갖춘 후보들을 추천하면, 정기 주주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선임 여부를 확정 짓는다.

그럼에도 재계 일각에서는 권력형 사외이사의 역할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외이사의 후보 추대에 경영진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들이 소액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김재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에 회사 대표이사 등 경영진이 포함돼있는데, 추천위원회를 경영진이나 이사회 의장이 마음대로 구성할 수 없도록 바꿔야 사외이사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사외이사 후보들이 과거 어떻게 활동했는지 소액주주들에게도 투명하게 공개해 제대로 투표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사외이사 후보들이 과거 여러 안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냈는지 등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서 소액주주들이 선호하는 인사를 직접 뽑을 수 있도록 절차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