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 주요국 국채 금리가 약세를 띠고 있다. 전쟁 국면에서 국채가 ‘안전 자산’으로 인식되며 수요가 늘자 국채 가격이 오르고 할인율(금리)이 낮아진 것이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여전히 큰 상황이지만, 금융 투자 업계 관계자들은 주요 선진국 국채 금리가 상승세로 돌아서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다. 인플레이션보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 우려 및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경기와 밀접하게 연동된 장기 국채 금리가 특히 높은 하방 압력을 받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그래픽=손민균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24일 밤 (현지 시각) 기준으로 1.96%까지 내려온 상태다. 지난해 말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지속하며 이달 15일 2.04%대까지 올랐으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전운이 고조되며 하락세로 전환했다. 단기물인 미 국채 2년물 금리가 여전히 1.58%대에서 횡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유럽 시장을 대표하는 독일 국채 10년물 금리도 이달 15일 이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2년물 금리는 지난 4일 -0.25대%까지 올랐으나 열흘 뒤 -0.474%로 하락했다. 국채 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채권 만기 시 현재 매수 금액보다 적은 돈을 돌려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손해를 보며 현금을 묶어 놓는다는 얘기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국채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며 금리가 하락한 것이다. 금리가 더 내리면 가격이 오른 국채를 매도해 차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통상 지금처럼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앞두고 있으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은 시기에 국채 금리는 오르기 마련이다. 채권은 만기에 받을 금액이 정해져 있어, 물가가 오르면 만기에 받을 돈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투자자들이 이를 우려해 채권을 내다 팔게 되면, 시장에 풀린 채권의 양이 증가해 채권 값이 하락하고 반대로 할인율(채권 금리)은 높아진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도 국채 금리가 하락하고 있는 이유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박승진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연말부터 기관 투자자들이 채권 보유 비중을 많이 낮춰 놓은 상황인데,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하며 안전 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져 증시에서 빠져나간 현금이 다시 국채로 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주요국 중앙은행의 긴축 속도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박 연구원은 “그동안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올 상반기 금리 인상 강도를 높일 것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왔지만, 우크라이나 이슈로 불확실성이 커지며 금리 인상에도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생겼다”며 “이 때문에 국채 금리의 하방 압력도 더 커졌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국채 금리 하락은 미국보다 유럽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양주원 미래에셋증권 해외채권 트레이딩팀장은 “유럽에서는 기준금리 인상보다는 채권 매입을 중단하는 양적완화 축소 정책을 준비하며 장기물 금리가 빠르게 오른 상태였는데, 우크라이나 사태로 이 같은 통화 정책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24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시위대가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지지하며 전쟁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금융 투자 업계 전문가들은 단기 금리보다 장기 금리가 더 많이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보통 만기 10년 이상의 장기 국채 금리는 향후 경기에 대한 전망을 많이 반영한다. 금리는 경제 성장률과 물가를 더한 값이다. 미래 경제 성장률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지면 결국 장기물 금리는 하향 조정된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사태로 경기 침체가 심화해 스태그플레이션(경제 불황+물가 상승) 우려가 커지면, 국채 10년물 금리가 하락세를 지속하고 단기물인 2년물 금리보다 더 낮아지는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전쟁 장기화로 인한 경기 침체 우려는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크다. 양 팀장은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특히 높아, 우크라이나 사태가 길어진다면 경제 회복이 더디게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보다 독일 국채 장기물 금리가 더 급격하게 하락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미국 및 유럽 주요국 국채 금리가 약세를 띠고 있는 것과 달리,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의 국채 금리는 약 7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국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을 제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채 10년물 금리는 24일(현지 시각) 장중 한때 14%를 넘었는데, 이는 지난 2014년 1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양 팀장은 “미 달러화로 표시된 러시아 채권 가격은 급등락하기 쉽지 않은데, 러시아의 5년 만기 국채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이 200bp에서 전쟁 직후 900bp까지 치솟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국채 CDS 프리미엄은 국가의 부도나 채무 불이행이 발생할 경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일종의 보험료와 같은 개념이다. 그만큼 러시아 국채의 투자 위험이 커졌다는 얘기다.

루블화로 표시된 러시아 국채 금리는 더 큰 상방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 달러화에 대한 루블화 환율이 연일 급등하고 있는 만큼, 러시아에서는 금리를 올려 통화 가치 하락을 방어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국채의 위험성이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박 연구원은 “러시아 국채는 생각보다 대외 노출 비중이 크지 않다”며 “러시아가 자신 있게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것도 서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 조치에 대한 방어막을 구축해놨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