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 기업 테라폼랩스(테라)에 투자한 카카오벤처스가 이 회사에서 발행한 루나(LUNA) 코인의 상환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테라의 자회사인 특수목적법인(SPC)에 투자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코인 가격이 지난해 수백 배까지 뛰며 천문학적 평가 차익을 얻게 됐다.
카카오벤처스가 이 같은 방법을 통해 1000억원 넘는 평가 차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다른 국내 벤처캐피털(VC)들도 암호화폐를 활용해 투자 수익을 극대화할 방안을 모색 중이다. VC가 암호화폐를 직접 보유하는 것은 현행법 상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암호화폐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금융당국의 감시망에 걸릴 위험이 있는 만큼, VC들은 당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코인에 투자하는 방법을 마련하고 있다.
◇ 테라 자회사 투자하고 루나 상환권 받아…“5억이 2000억 됐다”
6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카카오벤처스는 지난 2019년 테라에 투자한 뒤 테라 자회사 플렉시코퍼레이션에도 투자했다. 그 대가로 향후 루나 코인으로 엑시트(투자금 회수)할 권리를 얻었다.
플렉시코퍼레이션은 2018년 9월 설립됐다. 권도형 테라 대표이사가 대표로 있는 SPC로, 테라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 성수동에 본사를 두고 있다. 자본금은 175만원, 발행 주식 수는 3498주다.
테라는 암호화폐를 발행하고 이를 통한 간편 결제를 서비스한다. 간편 결제에 쓰이는 기축통화는 가격이 1달러로 고정된 UST이며, 루나는 UST의 시세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코인이다. 만약 테라 블록체인에서 간편 결제가 늘면 UST 가격도 올라가기 때문에, 이를 1달러로 유지하기 위해 루나를 소각해 UST의 유통량을 늘린다. 이때 루나는 가격이 오른다.
IB 업계에 따르면 카카오벤처스가 플렉시코퍼레이션에 투자해 루나 상환권을 얻었을 당시 코인의 가치는 5억원에 그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코인 가치는 작년 최고가 기준으로 약 2000억원까지 늘었다고 한다. 현재는 시세가 고점 대비 절반 수준으로 내렸지만, 여전히 코인마켓캡 기준 시가총액 9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코인’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카카오벤처스 관계자는 “코인 상환권을 아직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익이 얼마다’ 하는 것은 잘못된 얘기”라고 말했다. 플렉시코퍼레이션에 투자한 금액도 펀드 출자자(LP)들과의 합의 하에 비공개한다는 입장이다.
루나의 2018년 ICO(암호화폐를 만들기 위해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들로부터 초기 개발 자금을 모집하고 그 대가로 코인을 나눠주는 것) 당시 발행가는 120원에 불과했으며, 2019년 2월 마감한 프라이빗세일 가격은 967원이었다. 만약 카카오벤처스가 프라이빗세일 가격에 코인 상환권을 얻었다면, 작년 최고가 기준 평가 수익률은 122배에 달한다. 발행가 120원에 상환권을 얻었다면 수익률은 최대 980배가 넘게 된다.
루나 가격은 2020년 한해 동안 155~730원 사이에서 등락했다. 몇백원에 그쳤던 코인 가격은 지난해 초부터 급등하기 시작했으며, 12월 26일 사상 최고가 11만8370원을 기록했다.
플렉시코퍼레이션에는 카카오벤처스 뿐 아니라 우리기술투자도 10억원을 투자했다. 우리기술투자는 카카오벤처스와 함께 테라·두나무에 투자한 VC다. 이 회사는 2019년 플렉시코퍼레이션 주식 500주(지분율 14.29%)를 사들였으며 작년 초 83주를 처분해 417주가 남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이 417주의 작년 3월 말 기준 장부가는 취득원가(8억3400만원)의 20배인 170억원이었다. 루나 코인의 시세가 지난 한해 크게 오른 만큼, 지분 평가 가치는 수십~수백배까지 올랐을 것으로 예상된다.
◇ “간접적으로 코인 사는 효과…VC, 향후 코인 투자 불가피할 것”
카카오벤처스의 이 같은 투자 방식은 SAFT(Simple Agreement for Future Tokens)의 일종이다. SAFT는 미래에 코인을 돌려 받을 권리를 주고 현금을 받는 것이다. 미국 투자 업계에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한 VC 관계자는 “한국에서 VC가 스타트업에 투자를 할 때는 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사서 나중에 주식으로 바꾸는 것이 보편적인데, 카카오벤처스는 SPC에 투자하고 수익을 코인 시세에 연동했다”며 “간접적으로 코인을 사는 효과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희 법무법인 디코드 대표변호사는 “VC 같은 금융기관이 코인을 보유하는 것 자체가 법리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며, 정관 규정에 따라 주주총회 결의가 있으면 코인으로 현물 배당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VC의 코인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정책당국이 암호화폐 자체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벤처 펀드는 정부가 출자하는 모태펀드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특히 신기술금융사(신기사)는 금융위원회의 관리 감독 대상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코인을 직접 사들여 보유하는 것은 당국의 눈밖에 나기 쉬운 일이라고 VC 관계자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국내 VC들이 코인 투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향후 많은 스타트업들이 ICO에 나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VC가 기존 방식대로 A사에 투자를 해 지분을 보유 중이라고 가정하면, 향후 A사가 ICO를 할 경우 VC는 이론적으로 코인 지급을 요구할 자격이 생긴다. ICO를 하게 되면 A사의 이익이 기존 지분 투자사 뿐 아니라 코인 투자자들에게 골고루 배당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다만 코인의 가치 평가를 어떻게 할지 애매모호하다는 점이 문제”라며 “결국 VC 입장에서는 스타트업과 투자 계약을 할 때 ‘향후 코인을 발행하지 말 것’을 명시하는 수밖에 없는데, 암호화폐 생태계에 익숙한 젊은 창업자들의 특성상 앞으로 ICO를 통한 투자 유치는 불가피한 흐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VC 업계에서는 향후 지분 투자의 개념 자체가 모호해질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주식 대신 자체 발행 코인을 넘기는 방식으로 투자하는 사례가 늘어난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라는 것이다.
IB 관계자는 “ICO를 하려는 유망 스타트업들은 결국 해외에 자회사를 세워 외국계 VC의 투자만 유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VC 입장에서는 벤처 펀드 자체를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으로 조성해 스타트업이 발행한 코인으로 스왑하는 방식을 대안으로 삼을 수 있으나, 현 상황을 고려하면 이 역시 아예 미국으로 본사를 이전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