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 허윤석은 아직 대중화하지 않은 컴퓨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16비트 컴퓨터를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친구들이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동안 허윤석은 컴퓨터 학원에서 도스(DOS) 운영 체제의 프로그래밍 언어인 GW베이직을 배웠다.
그로부터 약 10년간 허윤석은 컴퓨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열혈 프로그래머'로 자랐다. IT 벤처 붐이 절정에 달했던 2000년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정보산업공학과 수업을 들으며 '큰 세상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그의 열정은 모바일 시대가 열린 2000년대 중반에도 식지 않았다. 개발자로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싶어 IT 업체에서 병역 특례로 복무했다. 벤처 붐을 이끈 창업가들처럼 직접 회사를 차려 경영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도 품었다.
인생사가 늘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기에 은행원으로 근무하며 잠시 돌아가는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IT 벤처 업계와 맞닿은 곳에서 일하는 것을 택했다. 현재는 벤처캐피털(VC) 대성창업투자에서 이사 직함을 달고 게임 및 융합콘텐츠 투자본부를 이끌고 있다.
허 이사는 2015년 대성창투에 입사한 이래 6년간 괄목할 이력을 쌓았다. 지난달 증시에 상장한 게임회사 크래프톤에 투자해 130배(지분 희석을 고려하지 않은 수치)의 수익을 냈고,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투자받은 뤼이드와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된 래디쉬에 모두 초기 투자했다. 뤼이드와 래디쉬의 투자 수익은 지분 희석을 배제하고 약 40~50배, 10배에 달한다.
허 이사는 그 외에도 펄어비스, 엔젤게임즈, 유티플러스인터랙티브, 빅픽처인터랙티브, 어비스컴퍼니, 시프트업, 앤유 등 30개가 넘는 게임·콘텐츠 업체에 투자하며 대성창투의 화려한 포트폴리오에 일조했다.
지난달 서울 강남구 역삼동 대성창투 사무실에서 허 이사를 만났다. 허 이사는 '멍 때리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과 다르게 언변이 상당히 좋았다. 투자 비화와 투자관 등을 묻자, 마치 오랫동안 준비했듯 평소 생각을 망설임 없이 술술 풀어냈다.
VC 입사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2002년 말 디지털매트릭스라는 회사에서 병역 특례를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모바일 바코드를 이용해 잠실 야구장의 티켓 예약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사람들이 내가 직접 만든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을 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휴대전화가 사실상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되겠다는 생각에, 모바일 산업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됐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KB국민은행에 다녔지만, 모바일에 대한 동경은 여전했다. 결국 카이스트 경영학 석사(MBA)를 거쳐 모바일 게임 업체 게임빌로 이직했다. 당시 게임빌은 컴투스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로, '별이되어라'와 '서머너즈워' 같은 게임들을 서비스하며 급성장하고 있었다. 게임빌 전략기획실에서 약 1년 반 동안 근무하며 오랫동안 열망하던 모바일 산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VC로 이직하게 된 이유는.
"벤처 붐이 불던 2000년대 초반에 대학교에 다녔다(연세대학교 수학과 00학번이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워낙 좋아했던 데다 벤처 붐을 지켜본 세대였기에, 컴퓨터나 모바일 분야의 벤처기업을 직접 창업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은행과 게임 회사에 다니면서도 언젠가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개발자로서 창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실제로 사업을 하다 겪을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창업가는 내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뿐 아니라 직원 가족들의 생사까지 전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다. 아이디어가 좋다든지 프로그래밍을 잘한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러던 중 MBA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되는 것을 옆에서 봤다. 벤처캐피털리스트는 직접 회사를 경영하지 않더라도 창업가들을 위해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창업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직업이더라. 결국 기회가 닿아 2015년 9월 대성창투에 심사역으로 입사하게 됐다."
대성창투에 합류한 뒤 가장 먼저 투자한 회사는 어디였는지.
"입사하고 나서 1년이 조금 안 돼서 크래프톤(옛 블루홀스튜디오)에 투자했다. 당시 크래프톤은 PC 게임 '테라'를 서비스하다가 모바일 게임 개발사 펍지스튜디오(옛 지노게임즈)를 인수하며 모바일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배틀그라운드'는 아직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신작이었고, 출시를 앞둔 게임 라인업 중 하나에 불과했다.
마침 크래프톤의 구주를 팔고자 하는 기관이 있길래 좋은 기회다 싶어 바로 인수했다. 현재는 기업 가치가 130배 정도 올랐다(공모가 기준). 지분 희석을 고려하면 약 100배 수익이 났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크래프톤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게임빌에서 일할 때부터 크래프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크래프톤에서 만든 모바일 게임 '데빌리언'을 게임빌에서 퍼블리싱(판매)했기 때문이다. 당시 잘 나가던 대부분의 게임사들이 투자나 인수를 통해 성장하거나 지적재산권(IP) 사업에 무게를 둔 반면, 그 때부터 크래프톤은 '개발사'라는 방향성을 굉장히 강조하더라. 또 남들과 똑같은 게임을 양산해서 매출을 내기보다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자는 포부가 뚜렷했다. 크래프톤은 그 점에서 동시대 '잘 나가던' 다른 게임사들과 달라 보였다.
대성창투에 온 뒤 크래프톤에 투자할 기회를 얻었지만, 회사가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영역을 확장하며 부침을 겪던 시기다 보니 투자심의위원회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그런 부침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당연히 겪어야 할 진통 아닌가.
개발사로서의 성장에 집중하려는 묵묵함과 창업자인 장병규 의장의 리더십에 대한 믿음이 워낙 견고했기에 투심위를 열심히 설득했다. 투자 후 이듬해인 2017년 배틀그라운드가 세상에 나왔고, 그때부터는 회사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크래프톤은 허 이사에게 큰 의미가 있는 회사일 것 같다.
"게임 회사에 대한 투자 성공 확률은 게임 성공 확률과 비슷하다. 그만큼 성공하기 어려운 분야다. 만약 첫 투자가 실패로 이어졌다면 이후 게임 회사에 계속 투자하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도 잘 되는 바람에 게임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크래프톤 이후 펄어비스에도 기업공개(IPO) 전 단계에 투자해 수익을 냈고, 두 건의 투자를 통해 내가 게임 투자로 유의미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그 덕에 시프트업, 엔젤게임즈, 앤유, 유티플러스인터랙티브와 빅픽처인터렉티브 등 잠재력 있는 게임 회사에 대한 투자를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게임 업체에 특히 투자를 많이 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면.
"유티플러스인터랙티브에 투자한 과정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유티플러스는 2006년에 설립돼 업력이 꽤 긴 게임 개발사다. 본래 액션 역할수행게임(RPG)이나 다중접속온라인역할수행게임(MMORPG)를 주로 만드는 회사였다.
대성창투로 이직한 후, MMORPG 개발사를 물색하던 게임빌에 유티플러스를 소개해 연결해줬다. 당시 MMORPG 시장의 경쟁이 워낙 치열했기 때문에 직접 투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애정을 갖고 유태연 대표와 종종 만나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러던 중 유티플러스가 2018년 샌드박스(아바타를 활용해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게임) '디토랜드'를 출시한 것이다. MMORPG나 기존 게임 장르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오기 어려운 반면, 샌드박스는 미래 게임 시장의 흐름과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보적인 크리에이터(창작자)가 게임을 만들어 일방적으로 서비스하지 않고,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판'을 벌여 그 안에서 다양한 콘텐츠가 쏟아져나올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샌드박스 안에서는 각 사용자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직접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때문에, 개발사 입장에서는 개발 비용뿐 아니라 마케팅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사업 효율성이 뛰어난 구조다. 결국 이듬해인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투자를 검토했고, 2020년에 투자를 집행했다."
3년 전이면 메타버스의 개념 정립조차 제대로 안 돼 있던 시기 아닌가. 투자가 반대에 부딪히지는 않았는지.
"주변에서 우려했던 부분은 이용자들이 직접 참여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시스템이 동양 문화권에 잘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서양인들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문화에 익숙하지만, 동양인들은 이미 정해지거나 주어진 것을 하는 데 더 익숙하지 않나. 이 때문에 투자 결정에 있어 이견이 있었다.
최근에는 이런 플랫폼이 메타버스라는 이름으로 많이 화제가 되며, 유티플러스의 기업 가치도 많이 올랐다. 여러 대기업으로부터 사업 제휴 제안을 많이 받고 있다. 경영진이 매일 같이 바쁘게 미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유티플러스는 메타버스라는 테마를 잘 만난 운 좋은 회사일까.
"유티플러스는 메타버스가 뜨고 난 후 갑자기 시장에 뛰어든 회사가 아니다. 유태현 대표는 이미 3년 전부터 샌드박스 게임에 관심을 갖고 미리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기에 변화의 물결을 잘 탈 수 있었다. MMORPG를 개발하며 쌓은 업력과 역량도 무시할 수 없다. 역량이 뛰어난 창업가가 이른 시기에 방향 전환을 잘한 것이다."
비전펀드에 투자받은 뤼이드에도 초기에 투자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17년에 투자했다. '산타토익'이 아직 베타 서비스를 하던 시기였다. 장영준 대표는 내가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창업가다. 여러 시행 착오를 거쳐 뤼이드를 창업한 후, 서창호 카이스트 교수 등 유명한 인공지능(AI) 전문가들을 계속 찾아 다니며 자문을 구해 결국 AI 엔진을 기반으로 산타토익을 만들어냈다.
장 대표는 특히 커뮤니케이션(소통) 능력이 뛰어난 창업가라고 생각한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먼저 좋은 인재를 확보해야 한다. 뛰어난 AI 엔지니어들을 설득해 회사에 합류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 투자자와 파트너사들을 설득해 자신의 비전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장 대표는 그런 측면에서 특히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뤼이드가 올해 5월 소프트뱅크 비전펀드에 2000억원을 투자받았는데, 당시 밸류에이션(기업 가치 대비 가격 수준)을 기준으로 약 40~50배의 투자 수익이 났다. 지분 희석을 고려하면 20배 정도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된 래디쉬에도 초기에 투자해 10배 넘는 수익을 올리지 않았나.
"드라마나 영화, 게임은 제작에 굉장히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투자를 받기가 쉽지 않은 분야다. 다만, 이미 흥행에 성공한 웹툰이나 웹소설을 소재로 콘텐츠를 제작한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투자 유치가 쉬워진다. '재료'가 될 수 있는 원천 콘텐츠의 중요성이 그만큼 큰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원천 소스가 될 수 있는 웹소설이나 웹툰 산업에 큰돈이 몰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고, 2019년 래디쉬에 투자했다. 아직 본격적으로 매출이 발생하지 않던 시기였다.
특히 래디쉬는 영미권에서 서비스되는 플랫폼으로, 향후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마침 이승윤 래디쉬 대표가 한국에 들어와 투자 유치를 추진한다는 말을 듣고 즉시 찾아가 투자 의사를 밝혔다."
'뛰어난 창업가'란 어떤 사람인가.
"위에서 언급했듯 소통을 잘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잘 이끌어내고 비전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빠른 속도로 실행하는 능력이다.
스타트업은 속도가 생명이다. 대기업보다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강점이 바로 속도다. 창업가가 빠른 속도로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스타트업이 한두 번 시도해볼 시간에 서너 번 시도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좋은 성과를 낼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게 된다.
좋은 아이템이 있다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무조건 '시도'만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매 시도에서 고칠 부분을 찾아내 개선해나가며 완성도를 높여나가야 한다."
요즘도 투자 검토를 많이 하는지.
"일주일에 한두 개 회사는 검토하는 것 같다. 대부분 콘텐츠 업체들을 많이 검토하고, 그 중 30%가 게임 업체다."
펀드 운용도 직접 하고 있나.
"300억원짜리 '대성블라썸일자리투자조합', 150억원 규모의 '스마트씨제이-대성메타버스투자조합'의 대표펀드매니저를 맡고 있다. 기술 기반의 서비스와 콘텐츠에 많이 투자하려고 노력 중이다."
기술 기반 기업에 투자하려면 신기술에 대해 공부도 많이 해야겠다.
"많이 하려고 노력 중이고, 전문성이 부족한 분야에 있어서는 AI 엔지니어인 팀원의 도움도 받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내가 이과 출신으로서 개발 업무를 직접 했기 때문에 기술 분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개발자들이 느낄 고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거나 쉴 때는 무엇을 하는지.
"사실 '멍 때리는'것을 가장 좋아한다. 대학교에 다닐 때 밴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한다(연세대 이과대 록밴드 '가이아'에서 보컬로 활동했다고 한다).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혼자 노래방에 갈 기회와 조용히 혼자 음악을 들을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VC에서 일하기 희망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투자를 통해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여러 상황과 여건이 잘 맞아떨어졌을 때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감사하게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투자한 회사 중에는 어려워져 문을 닫은 곳도 있다. 그럴 때는 멘탈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 시기를 잘 견뎌내기 위해서는 내가 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일하는 지 명확한 이유를 갖고 있어야 한다. 성과나 보상만 바라보면 힘든 시기에 버틸 동력이 없다.
나는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사회의 다양성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창업이 계속 이뤄지지 않으면 사회는 획일화하고 단순해질 수밖에 없다. 투자업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보고 명확한 목표를 갖고 꾸준히 투자하다 보면, 결국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