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대기업 계열 상사(商社)에 근무하던 신윤호 대리는 문득 ‘월급쟁이’로서 가질 수 있는 본질적인 의문에 직면했다. ‘5년 후, 10년 후의 내 모습은 어떨까.’

높은 연봉으로 잘 알려진, 취업 준비생들의 꿈의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신 대리는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다. 회사를 계속 다니다 보면 언젠가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 일하게 될 것이고,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업무를 반복할 것 같았다. 신 대리는 ‘예상이 가능한’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직업에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창업을 해 성공적으로 엑시트(투자금 회수)를 한 대학교 동기들과 컨설팅 회사에 다니다 벤처캐피털(VC) 심사역으로 새 출발 한 대학교 후배(오지성 뮤렉스파트너스 부사장)를 보며, 신 대리도 VC 심사역을 꿈꾸게 됐다. 그러나 전직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약 1년간 20여개 VC에 입사 원서를 냈지만 불합격 통지를 받았고, 2015년이 돼서야 투자 심사역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신윤호 베이스인베스트먼트 상무. /베이스인베스트먼트 제공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신 대리는 신현성 티몬 창업자와 강준열 전 카카오 최고서비스책임자(CSO)가 만든 베이스인베스트먼트에서 상무이사 직함을 달고 있다. 신 상무는 ‘최초’의 수식어를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업계에서 잘 알려진 심사역이다.

의류 도소매 플랫폼 신상마켓, 40~50대 여성을 위한 의류 쇼핑몰 퀸잇, 전국 수산 시장의 시세를 알려주는 인어교주해적단, 암호화폐 자동 매매 도와주는 헤이비트, 웹툰 등 콘텐츠를 직접 사고팔 수 있는 플랫폼 포스타입, 인공지능(AI) 기반 반도체 설계 솔루션 알세미 등에 최초 투자자로 이름을 올렸다. 모두 최근 스타트업 업계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이다.

이달 중순,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베이스인베스트먼트 사무실에서 신 상무를 만나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성장해온 과정과 투자관 등을 물었다. 온화하고 차분한 말씨가 인상적이었지만, 알고 보면 그는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 사흘 밤을 꼬박 동대문 시장에서 보낸 적이 있을 정도로 근성 있는 유형이다.

VC에서 근무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한국정보통신대학(ICU·정보통신부에서 설립한 대학으로, 현재는 카이스트에 통합됐다) IT경영학과를 졸업해 2009년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인터내셔널)에서 6년 9개월 동안 근무했다. 러시아에 건전지도 팔아보고, 인도네시아 경찰청에 경찰차도 팔아 봤다. 소프트뱅크나 NTT도코모 같은 회사에는 중계기도 팔았다.

그러다 대학 동기들이 창업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회사를 창업해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생기더라. 모바일 소셜커머스 업체 로티플을 창업해 카카오에 매각한 멤버들이 ICU 02학번 동기들이다. ICU 후배인 오지성 뮤렉스파트너스 부사장이 VC에 들어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대기업에서 7년 가까이 일했는데, VC와 대기업 문화는 꽤 다르지 않나.

“아니다. 사실 비슷한 점이 많다. 상사는 직원 한 명이 비즈니스디벨로퍼(사업 개발자)로서의 권한을 가진 회사다. VC 일도 혼자서 결정하고 진행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실제로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돼서 일을 해보니 상사에서 일한 경험이 꽤 많은 도움이 됐다.”

VC로 전직은 생각만큼 잘 이뤄졌는지.

“2014년부터 여러 곳에 지원했지만 20개 회사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떨어질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규모가 큰 VC가 많지 않아 대부분 회사에서 즉시 현장에 투입해 투자 심사를 맡길 수 있는 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그 VC들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2015년 9월 솔본인베스트먼트에 합격했고, 그곳에서 VC 업무를 시작하게 됐다.”

솔본인베스트먼트에 입사한 후 투자 활동은 어땠나.

“솔본인베스트먼트에 1년 3개월 정도 근무했는데, 그동안 투자를 한 건도 못했다. 내 능력이 부족했거나 VC업에 대한 고민이 깊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결국 2016년 12월 대교인베스트먼트로 이직한 후 2017년 5월에 첫 투자를 했다.”

연봉이 높은 직장을 포기한 만큼, 후회도 했을 것 같다.

“고민이 많은 시기였지만 내 선택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은 있었다. 내가 투자를 못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웠을 뿐이지, VC업 자체는 내가 잘하기만 한다면 정말 좋은 일이라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다. 창업가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가끔은 맹신하기도 하며 전적으로 투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유의미한 일이 될 수 있다.

월급쟁이라면 일을 통해 돈 외에도 다른 의미를 얻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월급은 1000만원을 받으면 2000만원이 받고 싶어지고, 2000만원을 받게 되면 3000만원이 받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월급만으로는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첫 투자를 하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궁금하다.

“서울대 석·박사들이 창업을 하면 잘 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서울대 연구실 홈페이지들을 찾아다니며, 재미있는 연구를 한다 싶으면 연구생들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내봤다. 답장을 보내와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현재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며 커리어를 쌓고 있기도 하다.”

/신상마켓 제공

2017년 5월에 처음 투자한 회사는 어디였나.

“동대문의 도매업자들과 패션 분야의 소매업자들을 연결해주는 신상마켓(법인명 딜리셔스)에 10억원을 투자했다. 소매업자가 사입(仕入)을 하기 위해 한밤중 동대문 시장을 직접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거래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서비스였다. 당시 3년간 투자를 한 번도 받지 않고 서비스를 하고 있더라.

사업성과 성장성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사흘 밤 내내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녔다. 3일간 200개 도매상에 신상마켓을 쓰는지, 쓴다면 왜 쓰는지 물었다. 그 결과 동대문 도매상의 40~50%가 이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상마켓은 현재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

“국내 2만여개 도매상 중 1만6000~1만7000개 도매상이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 소매상 중에서는 20만개 중 16만~17만개가 쓰고 있다. 투자 당시와 비교해 기업 가치는 15~17배가량 성장한 상태이며, 현재는 그보다 훨씬 높은 밸류에이션에 후속 투자를 유치 중이다.”

대부분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초기 투자가 중·후기 투자에 비해 더 어려운 점은 무엇일까.

“2018년 4월 베이스인베스트먼트의 창업 멤버로 합류한 이래 ‘기업의 첫 번째나 두 번째 투자자가 되자’는 취지로 초기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시리즈A보다 빠른, 사업 아이템과 아이디어만 있는 상태의 시드(seed) 단계에서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초기 투자에서는 일이 가정과 다르게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퀸잇을 서비스하는 라포랩스에 투자하기 전 겪은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의 고령화가 피할 수 없는 추세라고 생각해 시니어 시장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지난해 초 하이퍼커넥트(올해 초 미국 소셜 데이팅 서비스 ‘틴더’를 운영하는 매치그룹에 2조원에 인수됐다)와 토스 직원들이 시니어들을 위한 사업을 준비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내 나름대로 시니어 시장에 대해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고, 두 사람이 40~60대를 대상으로 한 커뮤니티 서비스를 출시할 때쯤 소액을 초기 투자했다. 예를 들면 ‘기타 배우기’라든지 특정한 목적을 가진 모임을 주선하는 서비스였다. 그런데 이 서비스가 생각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가정과 달리 서비스가 잘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리 좋은 창업자라도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나는 당시 시니어 시장의 성장성을 믿으면서 모든 사람은 외롭고 만남의 욕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투자를 결정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라포랩스는 결국 같은 해 11월 ‘4050 패션 쇼핑몰’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찾는 데 성공했고, 그 사업 모델(퀸잇)을 보자마자 필요한 만큼 투자해주겠다고 약속하고 4억원의 초기 투자를 집행했다. 당시 기업 가치가 98억원이었다(IB 업계에 따르면 현재 기업 가치는 2000억원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퀸잇은 요즘 성장성이 가장 높은 플랫폼 중 하나로 알려졌다.

“내가 투자하고 2달 뒤 바로 소프트뱅크벤처스, 카카오벤처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컴퍼니케이파트너스에서 100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현재는 여성복 쇼핑몰 앱 중 다운로드 횟수 5위 안에 든 상태다(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지난달 퀸잇의 사용자 수는 102만명으로 지난해 11월의 28배 수준이었다).

향후 사업의 확장과 진화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퀸잇은 현재 패션 쇼핑 플랫폼이지만, 가령 시니어 화장품(뷰티) 사업까지 영역을 넓힐 수도 있지 않겠나.”

/라포랩스 제공

‘진화’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사례가 또 있을까.

“올해 4월 1900여개 온라인 쇼핑몰의 리뷰를 관리하는 크리마에 10억원을 투자했다. 우리 회사가 최초의 기관 투자자였다. 크리마는 사용자들의 리뷰를 수집해 관리하고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사이즈 등을 추천하는 솔루션이다. 국내 시장에서 크리마의 솔루션을 사용하는 패션·뷰티 이커머스 업체가 거의 50%를 차지한다.

이 서비스의 진화 가능성은 이용자들의 취향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에 있다. 이용자들이 특정 상품을 어떤 이유로 구매했는지, 다음 시즌에는 어떤 색이나 패턴이 유행할지 정량적으로 분석해 보여주는 수준까지 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사역으로서 투자를 잘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호감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요즘은 VC 간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돈(투자금)은 너무 흔한 가치가 됐다. 그래서 창업가에게 호감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다시 한 번 만나서 얘기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가 생각하는 사업 방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창업가가 어떤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사람일지 판단하기보다는, 그 문제를 같이 풀도록 함께 고민하자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피투자사가 기본적으로 내 ‘고객’이라고 생각한다. VC로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그들이 만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VC 도움을 받아 성장을 경험한 창업가가 다시 좋은 창업가를 소개해주거나 다른 신생 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VC 도움으로 성장한 창업가가 다른 기업에 투자하는 사례가 실제로 많은가.

“중고품 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우리 회사에서 2018년 5월 번개장터에 10억원을 투자했는데, 이듬해 번개장터의 창업가가 보유 지분을 사모펀드(PEF) 운용사 프랙시스캐피탈에 엑시트한 후 생긴 돈을 우리 회사의 2호 벤처펀드에 직접 출자해줬다. 벤처펀드의 투자를 받는 입장에서 펀드의 출자자(LP)로 변신한 사례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창업가가 직접 동참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회사의 성장 과정을 옆에서 많이 봤을 텐데, 스타트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중요한가.

“스타트업의 성장 단계는 크게 둘로 나뉜다. 먼저 0에서 1을 만드는 단계가 있고, 그 이후에는 1에서 10을 만드는 단계가 있다. 0에서 1을 만드는 단계에서는 시도를 많이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즉, 주사위를 많이 던져봐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많이 던지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한 번을 던지더라도 효과적으로 잘 던져야 한다. 이 시도를 타당하고 논리적으로 잘하는 회사는 성장 가능성이 어느 정도 크다고 볼 수 있다.

0에서 1을 만들고 나면 신경 써야 할 문제가 더 많아진다. 회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면, 많은 창업가들이 그것을 다 소화해내기 어려워한다. 인재도 많이 필요하고, 자본도 필요하다. 퀸잇의 두 창업가(최희민·홍주영 대표)들은 이미 토스와 하이퍼커넥트에서 일하며 사업 확장 단계의 압력과 추진력을 체득하고 배운 경험이 있었기에, 서비스의 급성장을 효과적으로 소화해내더라.”

1에서 10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주는지.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인재를 많이 소개해주는 일이다. 신상마켓의 경우, 네이버와 쿠팡에서 근무했던 장홍석 공동대표를 내가 직접 소개해줬다. 신상마켓에 투자한 후 2~3년간 따라다니며 이직을 권했다. 지금은 우리 회사에 피투자사의 인재 채용을 도와주는 담당자가 따로 있다.”

어떤 창업가들이 성공한다고 생각하나.

“나는 꿈의 크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창업가 중에서는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라든지 ‘내 회사는 이 정도만 성장해도 충분히 만족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경우, 회사가 막상 기대 이상으로 급성장하면 성장세를 전부 소화하지 못하고 버거워한다. 반대로 꿈이 크다면 빠른 성장을 모두 소화하고 커 나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이기고 사업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각오가 돼 있어야만 한다. 스타트업 시장에 관한 얘기도 ‘승자들의 기록’이라 화려한 성공담만 많이 알려졌는데, 사실 고통 속에 사는 창업가들도 굉장히 많다.”

요즘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꽤 많더라. VC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심사역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들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은지’ 묻곤 한다. 높은 수익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VC보다는 헤지펀드 운용사에 가거나 직접 창업을 하는 것이 더 낫다. 벤처캐피털리스트는 오랫동안 버텨야 성과를 볼 수 있는 직업이다.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또 의사 결정을 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직업이다. VC 업은 결국 ‘투자를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의사 결정을 잘하기 위해서는 직관도 중요하지만, 겸손한 태도가 꼭 필요하다. 세상은 점점 더 빨리 변하고, 심사역은 매번 새로운 것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