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전문가들은 올해 반도체 업종이 주식시장의 상승을 주도할 것으로 전망한다. 수요가 공급을 크게 웃도는 '고압경제' 국면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간재인 반도체 수요가 필연적으로 급증하며, 주가 흐름도 좋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조선비즈가 경제 전문가 23명에게 '올해 증시의 주도 산업'을 질문한 결과(복수 응답 가능), 반도체 산업이 20표를 받아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2차전지는 11표를, 석유·화학 산업은 8표를 받아 각각 2, 3위에 올랐다.
대규모 재정 지출과 완화적 통화 정책을 시행하면, 풍부해진 시중의 현금은 우선 가계나 소비에 투입된 후 성장성이 가장 높고 잠재력이 큰 산업군에 투자된다. 수요가 늘어나는 고압경제의 특성상, 산업 성장성은 수요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최석원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부분 산업군에서 가장 많은 수요가 발생하는 기초 핵심 소재"라며 "인프라와 자동차, 온라인 플랫폼 모두 반도체에 대한 대대적인 수요를 담보하는 산업군"이라고 설명했다.
증시 전문가들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2분기에 들어 더욱 심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모바일용 반도체의 경우, 미 텍사스의 이상 한파로 인한 삼성전자 공장의 가동 중단으로 인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해짐 점을 근거로 꼽았다.
IBK투자증권은 2분기 낸드(NAND) 평균출하단가(ASP)가 전분기보다 0.4%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나금융투자는 2분기 디램(DRAM) 가격이 전분기 대비 13%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IT 자문기관 포레스터리서치는 현재의 반도체 부족 현상이 2023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수요가 계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공급 제한은 쉽게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리서치본부장은 "고압경제 정책은 당장 급한 불을 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경제 전반이 견조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반도체와 같이 높은 수익성을 보장하는 산업군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산업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차세대 성장 동력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13일 차량용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1조원 이상의 '반도체 등 설비 투자 특별 자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기업의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 공제율을 2배 이상 높이기로 결정했다. 반도체 기업은 이에 화답해 올해 중 41조8000억원을, 2030년까지 10년 동안 누적 510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미 바이든 행정부는 앞서 2조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 예산 중 반도체 분야에만 500억달러를 할당했다. 미 정부는 이와 함께 반도체 생산 시설을 구축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건당 30억달러를 지급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지난 3월 경기 부양을 위해 1조9000억달러 규모의 재정 지출안이 승인된 데 이어, 미래 먹거리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병행하기로 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2015년부터 반도체 산업에 대한 대규모 지원을 계속해왔다. 오는 2025년까지 반도체 산업 자급률 70% 달성을 목표로 총 1조위안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이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2030년 글로벌 반도체 생산량의 20% 이상을 점유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유럽연합(EU) 소속 19개 국가가 연합해 500억유로 규모의 기업 지원책을 추진 중이다.
반도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선택을 받은 2차전지 역시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 덕에 높은 수익성이 기대되는 신산업이다. 최 센터장은 "산업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자동차 관련 제품의 수요는 늘 중요한 문제였다"며 "4차 산업 혁명에서도 완성차의 내연기관이 배터리로 대체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말했다.
지난달 15일 시장조사기관 IHS마킷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전기차 판매 대수는 394만대를 기록할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판매 대수(228만대)와 비교해 70% 이상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오는 2025년에는 약 1126만대까지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IHS마켓은 분석했다.
최 센터장은 "연간 판매량이 최대 1억대(2017년 기준)에 육박하는 완성차의 내연기관이 점진적으로 배터리로 대체된다면, 2차전지에 대한 수요는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와 2차전지가 성장성이 큰 산업이라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 거의 이견이 없다. 다만, 성장성이 주가 상승으로 직결될 수 있을지는 재고해봐야 한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반도체는 물론 성장 산업이지만, 성장성에 대한 기대감은 이미 주가에 반영된 상태"라며 "올해 들어 미 증시에서 성장주들이 하락하는 반면 다우지수는 연일 상승세를 이어가는 만큼, 국내 증시에서도 반도체 등 성장주가 계속 오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고압경제 국면에서는 석유·화학 등 전형적인 시클리컬(경기민감주)의 투자 매력이 계속 커질 것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석유·화학 업종은 2018년 미·중 무역분쟁의 직격탄을 맞은 산업이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국내 화학제품 수출 증가율은 약 1%에 그쳤다. 화학제품 수출액은 경기 불황기에도 연평균 5%가량 증가했기 때문에, 이 같은 실적 부진은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센터장은 "미·중 무역분쟁 이후 국내 기업들은 석유·화학 분야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였는데, 그 여파로 현재는 공급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지난해 말부터는 글로벌 경기 회복세가 강해지며 석유 수요가 급증해, 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유가가 꾸준히 올랐다. 서부텍사스유(WTI) 7월물 가격은 올 초 배럴 당 47달러에 그쳤으나, 지난 3월 초 66.09달러까지 상승했다. 현재는 62~63달러대에서 등락하고 있다. 브렌트유의 가격도 올 초 배럴 당 52달러대에서 3월 초 69.63달러까지 상승했다.
화학제품에서도 수요·공급의 불균형으로 인한 가격 상승이 나타났다. 제품의 수요가 증가한 데다 미 텍사스에 있는 석유화학 공장들이 이상 한파로 3주 이상 가동을 멈추자, 공급에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LG화학(051910)은 올 1분기 고부가합성수지(ABS), 폴리염화비닐(PVC), NB라텍스 등의 수요 증가에 힘입어 창사 이래 최초로 1조원이 넘는 1조4081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의료용 라텍스 장갑의 원료인 NB라텍스 매출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