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공식 의결권 자문사가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기업가치 훼손과 독립성 훼손 등을 이유로 이사 선임안 135건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으나,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10일 대신지배구조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연구소는 올해 주총에서 1910건의 임원 선임안을 분석하고 그 중 135건에 대해 반대 의견을 권고했다. 주로 기업가치와 독립성 훼손이 반대 의견의 근거로 작용했다고 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135건 중 기업가치 훼손 이력을 근거로 반대 의견을 낸 이사 선임안은 총 31건이었다. 지난해 주총 때(14건)와 비교해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우리금융지주는 노성태·박상용·정찬형·전지평·장동우 사외이사의 재선임안이 문제가 됐다. 하나금융지주의 경우, 김정태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안 등에 대해 반대 의견이 나왔다.
이중현 연구원은 "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 판매 사태에 따라 기업 가치가 훼손됐는데, (기존 사외이사와 감사위원회가) 감시 의무에 소홀했다"며 "이사는 상정된 안건에 관해 찬반 의사 표시를 할 뿐 아니라 대표이사와 다른 이사들의 업무 집행을 감시·감독할 의무가 있다"며 "특히 다중 대표 소송제도가 도입되는 등 이사의 경영 책임이 강화된 만큼, 감시 의무 또한 강화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구소가 기업가치 훼손 이력을 근거로 들어 권고한 반대 의견은 주총에서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하나금융지주의 경우 김 회장을 포함해 7명의 이사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지만, 모두 원안 그대로 승인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소는 독립성 훼손을 사유로 17건의 사외이사·감사 선임안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권고했다. 그러나 정족수 미달을 사유로 부결된 김일환 코렌 감사 신규 선임안 1건을 제외하고 모두 주총을 통과했다.
이처럼 의결권 자문사의 권고가 무색하게 대부분의 이사 선임안이 원안대로 통과하는 현상은 국내 주총의 의결정족수 때문이다.
보통결의의 경우, 전체 주주의 4분의 1이자 주총에 참석한 주주의 과반수가 찬성해야 가능하다. 이수원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책임투자팀장은 "국내 기업의 평균 주총 출석률이 80% 미만이기 때문에, 지배주주의 지분율이 40%만 넘어가더라도 의안이 부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자문사의 권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 안에 여러 위원회가 있지만 사실상 중요한 결정은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전부 하고 있는데, 정부 관료나 진영 논리로 추천된 사람들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어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기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는 데만 급급하다"며 "그러다 보니 전문가의 의견을 충분히 수용하고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그 외에도 올해 주총에서 '3%룰'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3%룰이란 감사와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 대주주의 지분이 아무리 많아도 3%의 의결권만 행사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제도다. 이 제도로 인해 지배주주는 감사를 선임할 때 의결정족수를 채우기 어려워졌으며, 반대로 소액 주주는 선임에 있어 입김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중현 연구원은 "당초 소수 주주 측 이사 후보자의 선임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으나, 주주 제안 11건 중 가결된 임원 선임안은 단 1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유일하게 승인된 주주 제안은 이한상 한국앤컴퍼니 사외이사 겸 감사 선임안이었다. 그러나 이 선임안은 한국타이어 오너 일가인 조현식 부회장이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내놓은 안으로, 엄밀히 따져 개인 주주의 이해나 의사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박래수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모든 제도는 갈등과 조정 과정을 거쳐 필요성을 충분히 검토한 후에야 제대로 안착할 수 있다"며 "3%룰 역시 지금 당장은 물꼬를 트는 수준이지, 당장 구체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수원 팀장도 3%룰의 도입 자체에서 의의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금호석유화학의 경우, 박철완 상무가 주주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면 박찬구 회장 측에서 적극적인 투자 계획과 주주 환원 정책을 내놓기 위해 노력했을지 의문"이라며 "3%룰이 도입된 것만으로도 사측에서 주주 권익을 위해 좋은 이사 후보를 내고 좋은 안건을 내놓도록 하는 유인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