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후는 브레이브스의 전성기다. 당대 최고의 투수가 버티고 있었다. 그렉 매덕스다. 게다가 잘 나가는 포수도 있었다. 최고의 공격력을 갖춘 하비 로페즈다. 그런데 둘의 관계는 묘하다. 왠지 삐그덕거린다.

이들 중 갑(甲)은 단연 매덕스다. 그가 로페즈를 영 마뜩잖게 여긴 것이다. 때문에 파트너로 늘 다른 포수를 택했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다. 무려 5년 동안이나 이런 일이 계속됐다. 마스크를 쓴 건 에디 페레즈, 폴 바코 등등 그저 그런 얼굴들이다.

이 무렵 팀 내에는 그런 말이 돌았다. ‘ABL(Anyone But Lopez)’. ‘로페즈 빼고 아무나.’ 그런 뜻이다. 아무리 30홈런을 쳐도 소용없다. 올스타전에 나가도, 심지어 포스트시즌 때도 마찬가지다. 매덕스가 마운드에 있으면, 로페즈는 어김없이 벤치 신세다.

2루 송구가 별로라서? 프레이밍(미트질)이 시원치 않아서? 아니다. 이유는 딱 하나다. 눈치가 없어서다. 매덕스가 질색하는 게 있다. 투구 간격 늘어지는 것이다. 후다닥 사인 교환하고, 곧바로 던져야 직성이 풀린다.

기분 문제가 아니다. 논리적인 근거도 있다. 괜히 시간 끌면 투수가 불리하다. 타자가 숨 돌릴 틈이 생긴다. 이런저런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럼 왠지 볼 배합도 읽힐 것이라는 염려다.

파워보다는 기술로 승부하는 게 매덕스 스타일이다. 충분히 납득되는 면이다. 어떤 때는 사인과 다른 공도 서슴없이 던지곤 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공을 잘못 받아서) 로페즈의 손가락이 부러진 적도 있었다.

류현진이 4승째를 아깝게 놓쳤다. 아웃 1개를 남겨놓고 교체된 탓이다. 18일(이하 한국시간) 토론토 로저스 센터에서 열린 보스턴과 홈 경기에서 5회 2사 후 교체됐다. 기록은 4.2이닝에 6피안타 2볼넷 2탈삼진이다. 실점은 없었다. 1-0으로 앞선 상태여서 아쉬움이 컸다. 다만 평균자책점(ERA)을 2.62까지 낮췄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몇 차례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 찬사를 받았다. 무사 2, 3루를 두 번(2회, 3회) 넘겼고, 4회에도 1사 1, 3루에서 병살타로 이닝을 끝냈다. 이를 두고 현지 언론에서는 호평이 잇따른다. ‘위기에도 견고함을 유지했다’ (mlb.com) ‘몇 차례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탈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토론토 선).

다만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다. 포수와의 호흡이었다. 단짝 대니 잰슨은 부상으로 빠진 상태다. 대역으로 선택된 게 타일러 하이네만이다. 벌써 3게임째다. 공격형 포수인 알레한드로 커크가 계속 배제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물론 이 캐스팅에는 팀의 배려도 포함됐다. 역시 포수 출신인 존 슈나이더 감독은 “투수와 포수의 관계는 단기간에 이뤄지기 어렵다. 하지만 하이네만은 열심히 준비하는 선수다. 류현진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충분히 만족할 수는 없다. 이날도 류현진이 고개를 젓는 장면이 여러 차례 눈에 띈다. 포수가 내는 사인이 마땅치 않은 모습이다. 이닝 중간에는 스태프 한 명이 하이네만에게 관련한 뭔가를 얘기하는 장면도 중계 화면에 잡혔다.

이 대목에 매덕스의 논리를 대입해 보자. 속전속결이 중요하다. 타자를 몰아붙이기 위해 빠른 템포가 필수적이다. 그런 주장이다. 다양한 구질, 속도, 로케이션을 구사하는 투수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한번에 딱딱 맞아떨어져야 흐름을 탄다. 고개를 두어 번 흔들면, 이미 김이 빠진다.

특히나 요즘 환경은 더 그렇다. 피치 클락(투구시간제한)이 도입됐다.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면 마음이 급해진다. 때문에 배터리의 티키타카가 더 중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 피치컴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인 훔치기 사건 이후 MLB 사무국은 포수의 사인을 위한 전자 장비를 도입했다. 손가락 대신 버튼을 눌러 신호를 주고받는 방식이다. 이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투수도 이 장비를 착용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포수만 사인을 내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경우 투수가 거꾸로 구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류현진도 이런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보여준다. 포수 사인에 몇 번 고개를 흔든다. 영 마땅치 않으면 자신의 허리춤으로 시선이 간다. 그리고 벨트에 찬 피치컴의 버튼을 누른다. ‘이번엔 커브야’ ‘아냐, 체인지업으로 가자’ 같은 명확한 의사 전달이다.

수준급 투수들의 볼 배합은 복합적이고, 연계성을 갖는다. 하나씩 단절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적어도 다음 공, 심지어 3~4개 앞의 공까지 계산해서 던진다. 이를테면 ‘이번에 몸쪽에 직구, 다음은 바깥쪽 슬라이더, 그리고 세 번째는 다시 몸쪽 높게 붙이면 헛스윙이 나올 거야’ 같은 시나리오를 짠다.

매덕스가 그랬다. 그는 이미 머릿속에 다음, 그다음까지 뭘 던질지 훤하게 그림을 그린다. 그게 바로바로 이뤄지지 않으면 리듬이 끊기는 것이다.

그가 고안한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 공을 던진 직후 자신이 포수에게 신호를 보낸다. 미리 약속한 사인이다. 이를테면 ▶모자를 만지면 슬라이더 ▶뒷걸음질 하면서 (포수가 던진) 공을 받으면 직구 ▶발로 땅을 차면 커브 같은 식이다.

하지만 류현진은 그럴 필요 없다. 이젠 버튼 몇 개로 해결된다. 단짝 대니 잰슨이 다치기 전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구종을 정하는 1차적인 권한은 내게 있다. Ryu는 여전히 그걸 인정해 준다. 그런데 만약 두 번 어긋나면 바뀐다. 그가 직접 버튼을 누른다. 그럼 리듬도 깨지지 않고, 피치 클락도 괜찮다.”

물론 전자기기 다루는 솜씨도 중요하다. 아마도 훌륭한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인 것 같다. 1년 반의 폐관 수련에도 낯선 장비에 서툴지 않다. 역시 잰슨의 증언이다. “(류현진이) 우리 팀 누구보다도 피치컴을 잘 다룬다. 프로급이다.”

/ goorada@osen.co.kr

[OSEN=백종인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