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유도대표팀 허미미 선수가 29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샹 드 마르스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57㎏ 시상식에서 수여 받은 은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뉴스1

2024 파리 올림픽에 참가해 은메달을 목에 건 한국 여자 유도선수 허미미(21·경북체육회)의 이력은 독특하다. 허미미는 2002년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유도 선수였던 아버지를 동경해 도복을 입은 허미미는 중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이던 2017년 일본 전국중학교유도대회 여자 52㎏급에서 우승했고, 이듬해 일본 카뎃유도선수권대회 같은 체급에서 준우승했다. 유도를 배우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명문대인 일본 와세다대 스포츠과학부에 진학했다.

그렇게 일본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허미미가 곧잘 따르던 할머니가 2021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유언은 “한국 국가대표로 선수 생활을 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던 허미미는 곧장 한국행을 택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같은 재일 교포 김지수(23)를 따라 경북체육회 유도팀에 입단했다.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57㎏급에 출전한 허미미가 29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캐나다 크리스타 데구치와 결승전을 치르고 있다. /연합뉴스

입단 과정에서 허미미는 자신이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 선생의 5대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정훈 경북체육회 감독이 선수 등록을 위해 허미미의 본적지인 군위군에 방문했다가 관계자로부터 허미미가 허석 선생의 후손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김 감독은 지역 면사무소까지 직접 찾아 다니며 가족 관계를 조사했고, 허미미의 할아버지 허무부씨가 독립운동가 허석 의사의 증손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허석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격문을 붙이다 옥고를 치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그렇게 허미미는 한국 유도계에 입문했지만, 국가대표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2021년은 코로나19가 크게 유행하던 때였고, 출입국 절차도 까다로워 한일 양국을 오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도 아직 10대인 어린 딸을 걱정하는 마음에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을 만류하기도 했다.

허미미는 노력 끝에 지난 2022년 태극마크를 가슴에 얹게 됐다. 국가대표가 된 이후 허미미의 성장세는 거침없었다. 기존에 약점으로 평가받던 근력을 꾸준한 운동으로 보강했고, 다양한 국제 경험을 쌓으며 경기 운영 능력을 보완해 나갔다.

일본 와세다대 유도부에 허미미(왼쪽)가 입부했을 때 찍은 사진. /와세다대 유도부 홈페이지 캡처

이후 허미미는 2022년 6월 국제대회 데뷔전인 트빌리시 그랜드슬램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올해도 포르투갈 그랑프리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꾸준히 좋은 성적을 이어오다가 5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계 정상급 선수로 거듭났다. 한국 여자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건 1995년 여자 61㎏급 정성숙, 여자 66㎏급 조민선 이후 29년 만이었다.

두 달 뒤 허미미는 29일(현지 시각) 파리 올림픽 유도 여자 57㎏급 결승전에서 세계 1위 크리스타 데구치(캐나다)에게 석패하고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여자 유도 메달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48㎏급 정보경 이후 8년 만의 기록이다.

허미미의 은메달 소식은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금메달 결정전에서 만난 상대 선수 크리스타 데구치 역시 일본인 어머니를 둔 선수다.

와세다대 유도부가 인스타그램에서 허미미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소식을 전했다. /인스타그램 캡처

일본 스포츠신문 스포니치는 “크리스타 데구치(出口)는 나가노현 시오지리시 출신으로 마쓰상학원고교, 야마나시가쿠인대 등에서 활약했다”면서 “아버지의 모국인 캐나다로 국적을 변경했고, 세계 랭킹 1위로 파리행을 확정 지었다”고 소개했다. 허미미에 대해서는 “도쿄 출신의 재일 3세”라고 소개하며 “이케다 우미(池田海実)라는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다. 현재 와세다대학 스포츠과학부 4학년으로, 여자 유도부의 부장(副将)을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승전 후 공동취재구역 인터뷰와 공식 기자 회견에서도 허미미의 한국행에 대한 일본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한 취재진이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을 선택한 결단에 대해 묻자, 그는 “(그 덕에)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많은 선수와 같이 겨룰 수 있었다.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또 “할머니께서 한국에서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면 좋겠다고 하셔서 한국을 택했다. (할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엄청 잘해주셨다”며 “나는 할머니만 믿고 따르며 살아왔으니, 한국을 선택하게 됐다”고 전했다.

허미미는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시상대에서 울려 퍼질 애국가를 함께 부르기 위해 가사도 미리 외웠다고 한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는) 못 불러서 아쉽다. 다음 올림픽에서는 꼭 부르고 싶다”며 4년 뒤를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