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동오리. 검은 비닐이 씌워져 있는 땅 위로 말라 비틀어진 농작물이 뿌리를 드러낸 채,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면적 1878m²(약 568평)짜리 이 땅은 국내 대형 건설사 A사의 계열사인 한 농업법인이 사들인 곳이다.

국내 건설사 A사의 계열사인 한 농업법인이 보유한 경기도 화성시 동오리 토지.

A사가 농업법인을 설립한 시기는 2019년 7월이다. 토지 용도는 답(논)으로 분류돼 있는데, 이곳에 가보니 실제 농사 활동이 이뤄지지 않고 사실상 방치돼 있었다. 이 회사가 보유한 토지 주변 농지에서 40년간 농사를 지은 60대 농부 B씨는 "매주 2~3일씩은 나와서 농사를 짓는데 지금까지 그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 한 명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A사가 다른 용도로 개발할 목적으로 사들였다는 얘기도 나왔다. 또 다른 주민은 "일전에 내 땅을 사고 싶다면서 접근한 적이 있었는데 요구를 거절했다. 주차장을 만들 목적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인근에 같은 농업법인 이 소유 1874m²(567평) 면적의 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살짝 파인 고랑 위를 검은 비닐로 덮어둔 지역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아예 잡초와 자갈이 덮여 있다. 비닐이 덮인 것을 제외하면 경작의 흔적은커녕 방치된 모습이 역력하다.

A사는 "계열사가 공장을 건설하면서 인근 지역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지주들의 민원이 많아, 아예 땅을 매입한 것"이라며 "일반법인은 농지 취득이 불가하다 보니 농업법인을 통해 농지를 매입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기업들도 토지 매입에 농업법인 적극 활용

조선비즈는 김형동 의원실(국민의힘)을 통해 2016~2020년 농업회사법인과 영농조합법인(이하 농업법인)들의 경기도 내 토지 취득 기록을 입수, 분석했다. 분석 결과 몇몇 대기업들이 농업법인을 세우고, 토지를 사들이는 행태가 드러났다.

B 대기업 집단 산하 농업법인이 소유한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의 농지.

해운, 건설, 금속가공, 기계산업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B그룹이 대표적이다. B그룹 산하 농업법인의 대표자는 B그룹 회장의 장녀로, 한 주력 계열사 사장을 맡고 있다. 감사도 B그룹 회장의 셋째 딸이다.

취재 결과 계열사인 농업법인이 지난해 매입한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의 땅은 철제 울타리가 설치된 숲과 4월 중순에도 새싹이나 마찬가지인 경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해당 농업법인은 최근 신도시로 선정된 고양 창릉을 비롯해 7만4000㎡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다. 2020년 매입 건은 일부에 불과한 셈이다.

‘현금부자’로 알려진 C사도 농업법인을 계열사로 갖고 있다. 2015년 8월 설립된 이 회사는 2016년부터 작년까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마산리, 이천시 설성면 송계리, 여주시 가남읍 대신리 일대에 총 6만4600m² 땅을 매입해 보유하고 있다.

◇ 부자들 절세 목적으로 활용… 꼼수도 만연

전문가들은 기업들의 이 같은 행위가 왜 농업법인이 일부 부유층들에게 토지 투자 수단으로 주목받는지를 잘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토지 투자에 가장 걸림돌 중 하나인 농지 취득 자격 제한을 받지 않고 ▲취득세나 종부세 등 세금을 회피할 수 있으며 ▲정책자금 등을 통해 대출을 받기도 유리하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컨설팅 전문가는 "농업법인이 땅 투기 수단으로 널리 쓰이게 된 건 오래전부터"라며 "농업활동을 하는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는 제한이 있지만, 이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은 많은 데다 ‘편법’이긴 하지만 여러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세금이다. 우병탁 신한은행 부동산투자자문센터 팀장은 "조세특례제한법 등에 따라 농업활동을 목적으로 농지를 매매할 경우 취득세와 양도소득세 감면 혜택이 있기 때문에 개인 명의로 사들이는 것보다 절세 효과가 크고 대출 면에서도 용이하다"고 설명했다. 현행법상 농업법인은 영농·유통·가공에 직접 사용하기 위해 취득하는 부동산에 대해서는 취득세의 100분의 50을, 과세기준일 현재 해당 용도에 직접 사용하는 부동산에 대해서는 재산세의 100분의 50을 각각 2023년 12월 31일까지 경감한다.

상속이나 증여에도 농업법인은 뛰어난 절세 수단이다. 우 팀장은 "법규상 개인 명의로 보유한 땅을 농업법인으로 넘기는 현물출자를 하는 경우 땅을 궁극적으로 판 게 아니라고 간주해 농업법인이 처분할 때까지 양도세를 유예할 수 있고, 현물출자를 통해 농업법인은 취득세 비용도 발생하지 않아 취득 면에서도 유리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농업법인에 대한 대출 형태로 법인 대주주나 그가 소유한 기업이 고리(高利)로 자금을 빌려주고 이를 비용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여럿이다.

신도시 개발 지구에 다수의 토지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한 농업법인의 지난해 자산은 330억원인데, 부채는 266억원이다. 이 농업법인은 두 회사로부터 각각 연리 5.0%로 118억원, 연리 5.6%로 125억원을 각각 빌렸다. 농업법인 대표는 두 회사 중 한 곳의 감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회사가 지역농·축협에 16억원을 대출받았을 때 조건은 각각 연리 3.88%와 4.24%다.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대표(회계사)는 "과도하게 높은 금리로 자금을 빌려주고 이자수익 형태로 매각 차익을 미리 선취하는 방식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조사 결과 농업법인을 한 사람이 여러 개 가진 경우도 있다. 서울 테헤란로에 세워진 2017년과 2018년 각각 설립된 농업법인 두 곳은 대표이사가 동일하다. 이렇게 농업회사를 쪼개면 외부감사기준인 자산 100억원을 회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정부·지자체 관리감독 소홀이 문제 더 키워

농업법인이 ‘토지 투자’ 수단으로 널리 쓰일 수 있는 원인으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사후 관리·감독 소홀을 꼽는다. 토지 매입에 다양한 특혜를 제공하는 제도를 도입하면서, 이를 악용할 소지를 그대로 방치한 게 문제를 키우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2016년 감사원은 농업법인 지원 및 관리실태를 조사하고, 농업법인이 부동산 단기차익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농식품부는 농지 취득 자격 증명 등을 강화하도록 행정규칙을 바꿨다. 하지만 5년이 지난 현재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감사원은 지난해 농식품부 정기 감사에서 농업법인 실태를 다시 조사하면서, ‘비목적사업 영위 농업법인 관리 부적정’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농식품부, 농어촌공사, 평택시, 양평군에 회람했으나 제대로 된 제도 보완이나 개선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김형동 의원은 "농업법인이 대놓고 부동산 개발을 내세우는 경우에도 이를 관리감독하지 않고 있을 정도"라며 "농업법인의 토지 매입 및 매각 행태에 대한 인허가나 사후점검도 허술하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정다운

부동산업계에서도 농업법인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제도의 허점이 분명하고, 이를 악용하는 사람도 많은데 제대로 제도 보완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불법 행위가 판을 칠 수밖에 없다"면서 "영농에 뜻이 있는 농업법인은 물론이고, 건전하게 토지 투자나 농지 활용을 하려는 사람까지 손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공익법인에 대한 관리감독 체계를 준용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우병탁 팀장은 "공익법인을 참고할 만하다"면서 "공익법인 제도를 악용해 자본 증식을 노리는 문제가 불거진 이후 공익법인에 대한 공시 의무화 등 법 제도가 강화됐다"고 말했다. 현재 공익법인은 출연재산, 외부전문가의 세무확인, 결산서류, 기부금 모금액 및 활용실적 등 크게 4가지 항목을 공시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농업법인 등록이나 공시보다 행위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소기업이나 마찬가지인 농업법인에 부담을 안기기보다는 토지 분할 등을 막아 기획부동산 등의 유입을 막는 게 낫다는 것이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농업법인이 문제라는 식으로 규제를 강화해버리면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문제가 되는 기획부동산들은 농업법인을 세워 농지를 사들이고 나서 지분 쪼개기를 해 개인들에게 되파는데, 이러한 지분거래를 못 하도록 막아버리면 이런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