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이 이사회의 거버넌스 위원회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고 ESG 경영에 돌입하면서 건설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SG 경영은 수익 추구에만 몰두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방향으로 기업을 경영한다는 개념이다.

삼성물산은 재건축 등 정비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등과의 갈등이 계속 불거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건설업계에서는 조합의 책임으로 돌리는 ‘기존의 재건축 관행’을 뛰어넘겠다는 태도로 접근하지 않으면 ESG 경영은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고 지적한다.

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본사 전경.

◇ "원베일리 재건축 사업장 ‘창호 설계' 문제, ESG 경영과 맞지 않아"

21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삼성물산이 시공하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 원베일리(신반포3차·경남) 재건축 정비사업장에서 갈등이 끊이질 않고 있다. 이 현장은 지난 8일 서초구 엘루체컨벤션에서 열린 대의원 회의에서 조합 집행부와 ‘비대위’로 불리는 조합원들 간의 갈등이 다시 표출됐다.

이날 갈등의 핵심은 독일 프로파인(Profine)사 창호 등 시공 문제였다. 회의에는 사업시행(변경)계획 수립의 건이 상정됐다. 일부 조합원 측은 창호 교체 등 설계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조합 측은 공사가 중단되면 비용이 100억원 가량 늘고 입주도 지연된다며 반대해 맞붙었다. 안건은 부결됐지만, 상당수 조합원은 주택 평형과 상관없이 거실 창호가 3.6m로 설계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을 여전히 내고 있다.

원베일리는 전용면적 46㎡(19평)짜리부터 전용면적 168㎡(68평)와 펜트하우스 14가구로 구성돼 있다. 창호가 원안대로 시공될 경우 전용면적 84㎡(34평)부터 101㎡(41평), 116㎡(46평), 133㎡(53평), 168㎡(68평)의 거실 창호 크기가 모두 같다. 거실 크기는 커지는데 창호 크기가 그대로라는 뜻이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평수가 다른 데 창호 크기를 같이 하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것"이라면서 "미관상 이상할 뿐더러 주택 크기에 따른 창호 및 단열 시공은 건설사가 쌓아온 기술이 있는데 이를 일괄적으로 한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A조합원은 "조합은 내열 등 성능이 좋은 독일 브랜드 창호를 쓰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지만, 사후관리(AS)가 잘 되는 국내 고급 창호를 놔두고 왜 굳이 그 창호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B조합원은 "궁극적으로 조합과 하청업체의 유착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라면서 "삼성물산은 조합 뒤로 숨고 조합은 지반 문제 등 본질과 떨어진 이야기만을 반복한다"고 했다.

일부 조합원은 ‘삼성’ 브랜드를 믿고 삼성물산을 시공사로 선정했는데 배신감이 크다고 토로했다. 삼성물산이 ESG 위원회를 꾸리면서 ‘정도 경영’이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는 대목이다.

건설업계 일각에서도 시공사가 의견을 충분히 낼 수 있는데 삼성물산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삼성물산은 시공사인 만큼 조합이 내준 설계에 의해 시공만 한다는 원칙적인 답변을 반복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재건축 시장에 복귀한 이후 반포 1단지 3주구 수주전에서도 입방아에 오른 바 있다. 대우건설은 지난해 5월 "H조합장이 삼성물산과 공모해 조합원들에게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삼성물산과 H조합장을 고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고소는 H씨가 반포3주구 조합원들에게 대우건설이 반포3주구 시공사로 선정돼선 안 된다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데 따른 것이다. 대우건설이 실제 고소 과정에서 삼성물산을 제외하긴 했지만, 건설업계에서는 법적 책임과 별도로 윤리적 책임의 문제는 여전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한편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이들 사안을 어떻게 판단할 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원베일리 조합원들은 준법감시위원회에 릴레이 신고를 펼치는 중이다.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국정농단 재판 과정에서 준법경영 감시기구인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했다.

준법감시위원회는 정기회의를 통해 삼성그룹의 현안을 점검해 위법 소지가 있는 사안을 심사하는 역할을 한다. 위원회의 활동은 앞으로 진행되는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관한 첫 공판을 앞두고 있다. 22일 열릴 공판에서는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목적으로 부적절한 개입을 했는지가 중점이 될 것으로 전망이다.

◇관급공사 입찰 담합하고도 10년간 소송하며 처벌 피해…"책임지는 자세 아냐"

삼성물산은 최근 관급공사 입찰 비리 문제로도 도마에 올랐다. 법조계에 따르면 경기도 부천시는 지난달 14일 서울 지하철 7호선 부천 구간 건설에 참여한 4개 건설사의 입찰 담합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이 공사는 삼성물산 등 4개 건설사가 부천시와 서울시로부터 수주한 것이다. 온수∼상동 7.37㎞ 구간을 건설하는 이 공사의 공사비는 8000억여원이다. 이들은 서로 들러리 입찰에 참여해주면서 각각 공사를 수주했다.

부천시는 지난 2010년 270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문제는 삼성물산이 담합과 들러리 입찰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닌 소멸시효를 이유로 소송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금전 지급을 목적으로 하는 지방자치단체의 권리는 5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하는데 이를 지금 따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이었다.

이 소송은 2019년 대법원 상고심에까지 올라갔다. 약 10여년 동안 부천시는 사실상 세금으로 소송비용을 치러야 했다. ESG 경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부천시 관계자는 "담합과 들러리 입찰을 한 것은 수년 전에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지적한 사안"이라면서 "부천시와 서울시에 손해를 끼친 것이 확인이 됐는데 소멸시효를 두고 법리적 다툼을 10년째 한 것"이라고 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2001년 SK 소버린 사태를 잊으면 안 된다. 당시 소버린은 기업 지배구조에 문제를 삼았고, SK는 적대적 인수합병 위험에서 벗어난 뒤에 지배구조 개선을 천명했는데 2010년에 최태원 회장의 회사 자금 유용으로 지배구조에 큰 문제를 드러냈다"면서 "그때 지배구조 개선이나 정도 경영, 책임 경영이란 말은 다 쇼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삼성물산도 자꾸 이런 사례가 나오면 같은 평판을 받게 된다"고 했다.

박경서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ESG 경영을 선언했다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소지를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내규나 방침을 만들어여 한다"면서 "ESG 경영은 법보다 적극적인 개념으로, 기업이 선언을 했다면 그에 마땅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