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들에게 재계와 활발한 소통을 지시한 후 이호승 청와대 정책실장이 경제단체와 릴레이 면담을 하고 있는 가운데, 문재인 정부에서 대표 경제단체로 부각된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가 친(親)정부 일변도의 행보를 보이면서 ‘지나치게 정부 눈치를 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실장은 지난 7일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8일에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한국중견기업연합회, 14일에는 무역협회를 각각 방문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는 안일환 경제수석과 이호준 산업정책비서관도 배석한다. 재계에서는 청와대가 올해 첫 경제단체장 만남 대상으로 최 회장을 택한 것을 두고 올해도 정부가 대한상의와 우선적으로 소통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태원(맨 오른쪽)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의를 찾은 이호승(맨 왼쪽) 청와대 정책실장을 접견하고 있다.

과거 대한상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경총, 중소기업중앙회 등과 한목소리로 경제계를 대변해 왔으나,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이들과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한상의는 최근 몇년간 경총·전경련 등 경제단체들이 공동으로 진행하던 행사에 자주 불참했다. 2019년 12월 열렸던 ‘시행령 개정을 통한 기업경영 간섭, 이대로 좋은가’ 세미나, 지난해 2월 국민연금 독립성 확보를 위한 지배구조 개선 공동 세미나, 7월 ‘상법 개정안 무엇이 문제인가’ 공동 토론회, 9월 상법·공정거래법에 대한 6개 경제단체 공동 성명 등에서 모두 빠졌다.

지난해 ‘기업규제법’이라 불리는 ‘경제 3법’(상법·공정경제법·금융그룹 통합감독법) 처리를 앞두고는 경제단체가 목소리를 따로 내는 모습도 보였다. 작년 11월 대한상의가 경제 3법을 두고 민주당과 ‘공정경제’ 입법현안 토론회를 열자, 그 다음날 손경식 경총 회장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이 점심 회동을 하고 별도 행보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대한상의가 2018년 7월 19일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개최한 제43회 제주포럼에서 유시민 작가가 강연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경제단체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대한상의가 정부 눈치를 너무 심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나온다. 대한상의는 지난 2018년 7월 19일 전국의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매년 개최하는 ‘제주포럼’에 유시민 작가를 초청했다가, 유 작가가 국내 대기업 2·3세 경영자들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보다 못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유 작가는 대한상의가 1여년 전부터 공을 들여 초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대한상의와 전경련은 매년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에서 포럼을 여는데, 유명한 강연자나 참석자 숫자를 놓고 물밑 경쟁을 벌여왔다"면서 "대한상의 포럼에만 홍남기 경제부총리, 성윤모 산업부 장관, 박영선 당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 정부 측 인사가 대거 연사로 참여해 정부가 눈에 띄게 힘을 실어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문재인(오른쪽 두번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28일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열린 노사정 협약식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참석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왼쪽부터 손경식 경총 회장, 박용만 전(前) 대한상의 회장, 문 대통령,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문 대통령은 앞으로도 대한상의와 돈독한 관계를 이어갈 뜻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상공의날 기념식에 참석해 "과거에 음습하게 (기업인과) 모임이 이루어지면서 뭔가 정경유착처럼 돼버리는 부분이 잘못된 것이지, 공개적으로 기업들의 애로를 듣고 정부의 해법을 논의하는 것은 함께 힘을 모아 나가는 협력 과정"이라며 "유일한 법정 종합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가 정부와 업계를 잇는 든든한 소통창구가 되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치권이 ‘기업 규제법 폭탄’ 공세를 퍼붓고 있는데, 경제단체를 대표하는 대한상의는 정작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다른 경제단체와 힘을 합치지도 않고, 따로 강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한다"면서 "LG화학(051910)·SK이노베이션(096770)배터리 분쟁 등 진짜 중재가 필요한 곳에 힘을 쏟을 수 있는 경제단체 통합 리더십이 절실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