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초 인공지능(AI) 챗봇인 '이루다'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개발사인 스캐터랩은 "인간 수준의 대화가 가능한 AI를 만들겠다"며 이루다를 공개했고 서비스 2주 만에 가입자가 80만명을 넘었다. 하지만 성희롱과 동성애·장애인 혐오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개발 과정에서 개인정보 유출이 있었다는 문제도 나왔다. 결국 이루다는 인기 만큼이나 빠르게 서비스가 종료됐다.

5년 전 '알파고'가 우리 사회에 충격을 안겨줬다면, 이루다는 AI 시대에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를 던져줬다. 국내 최고의 AI 법률 전문가들은 이루다 사태를 어떻게 봤을까.

법무법인 태평양 AI팀. 왼쪽부터 이상직·이수진 변호사, 김득원 전문위원, 이재규·마경태 변호사.

이상직 변호사(사법연수원 26기)는 법무법인 태평양의 데이터AI전략자문팀(AI팀)을 이끄는 동시에 국가지식재산위원회 AI-IP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AI 법·제도 마련에도 앞장서고 있다. KT 법무센터장(전무)을 지내며 기업 현장에서 활동한 적도 있다. 이 변호사와 태평양 AI팀 변호사들을 함께 만나 '이루다' 사태를 비롯한 AI 관련 법·제도 전반에 대해 물었다.

-AI 발전에 따라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충돌도 커지고 있다. '이루다' 사태가 가장 최근 사례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과거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불법 영화나 웹하드, 음란물 유통 등의 문제가 있었다. 그런 문제가 상당기간 이어졌다. 반면 이번 이루다 사태에서는 논란이 시작되고 20여일 만에 서비스가 중단됐다. 시장 차원의 자정기능이 작동한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AI 윤리기준을 만들어 감독하고 있다. 이루다 같은 AI는 알고리즘이고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자율적이고 규범적인 방법으로 통제하면 된다. 이루다 논란은 시장 차원의 자정기능이 잘 작동했고, 자율적인 통제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산업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AI 산업에 지나친 규제는 피해야 한다는 뜻인가.
"아기를 키워보면 2살, 3살일 때는 아무런 사회 규범을 모른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보면 그대로 따라하기 마련이다. 그런 아이들한테 19세 이상 성인에게 적용하는 사회 규범을 그대로 적용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가 없다. AI도 마찬가지다. AI가 출시되자마자 스무살 성인으로 세상에 나오는 게 아니다. 아이들처럼 배우고 익히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강한 규제 없이 AI를 키우는데 한국만 강도높은 규제를 한다면 추후 경쟁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글로벌 상황을 살피지 않고 국내 환경만 보고 산업 전략이나 규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국 AI 관련 규제가 다른 나라보다 강도가 높은 편인가.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해서는 유럽연합(EU)보다 한국이 더 빠르고 엄격하게 규제하는 편이다. 인터넷 산업이 앞선만큼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한 우려도 컸다. 정보통신망법에 개인정보보호와 관련한 부분이 추가된 것도 그런 이유다. 세상 어디에도 이정도로 강력한 법은 없다. 해외의 법·제도를 우리가 무분별하게 가져다 쓰는 것도 문제다. 한국 산업에 맞는 합리적인 지원체계와 규제체계를 만들고, 한국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해외에서 만든 규제체계를 그대로 가져와서 쓰면 AI 산업에서 우리 기업이 퍼스트 무버(선도자·first mover)가 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스캐터랩의 AI 챗봇 ‘이루다’.

태평양은 지난해초 AI팀을 설립했다. AI를 전문으로 다루는 팀을 만든 건 대형로펌 중에서도 많지 않다. 이상직 변호사와 함께 이재규·마경태·이수진·김종윤 변호사, 김득원 전문위원 등이 AI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태평양 AI팀은 테슬라 전기자동차 국내 도입에 대한 자문과 넷플릭스의 국내 서비스 런칭 관련 컴플라이언스 자문, 바이트댄스의 틱톡 서비스를 위한 개인정보 컴플라이언스 자문 등을 담당했다.

자율주행차량, 금융상품, 모빌리티 등 다양한 영역에서 AI를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창출할 때 필요한 법적 자문을 모두 맡고 있다. 또 공공기관의 AI 관련 법·제도 마련에도 참여하고 있다. 정부에서 기업들을 위한 AI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는데, 태평양 AI팀도 별도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AI와 관련한 기업들의 자문 수요가 많은 편인가.
"아직 시장 초기 단계지만 자문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특정한 서비스의 거래조건에 대한 자문 수요가 많다. 예컨대 새로운 택시 요금제를 설계할 때 AI를 이용한다. AI가 만드는 요금제가 국토교통부의 가이드라인을 위반할 가능성이 없는지 등을 우리가 따져볼 수 있다. AI 알고리즘이 현행법을 어기는 부분이 있는지 등도 따질 수 있다. 기업의 인수합병(M&A) 과정에서도 AI가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인수하려는 회사가 보유한 AI가 법적으로 문제 없는지 따지는 것도 M&A에서 중요한 절차가 돼가고 있다."

-해외에서는 AI를 둘러싼 법적분쟁이 많은데, 국내에도 영향을 줄만한 사건들이 있나.
"기업들은 영업비밀로 AI 알고리즘을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고객 입장에서는 나의 개인정보가 AI 알고리즘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궁금할 수 있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는 고객에게 맞는 영상을 추천해주는데 고객이 어떤 알고리즘으로 나한테 이런 영상을 추천해준거냐고 따질 수 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입법이 추진되고 있는데, 최근에 국내에서도 정부 차원에서 입법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나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비슷한 내용의 입법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어떤 정보를 공개해야 할 것인지, 영업비밀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등 여러 문제가 있다."

-AI 산업 발전을 위한 선결과제가 있다면.
"지식재산기본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 이 법이 2012년 만들어진 이후에 딱 한 번 개정됐다. 그마저도 지식재산의 날을 만들겠다고 한 법 개정이었고, 실질적인 내용은 개정된 적이 없다. 공공부문에서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가 쌓이고 있는데, 이를 좀 더 효과적으로 관리할 시스템이나 거버넌스는 부재한 상황이다. 공공부문의 데이터는 대한민국 전체의 지식재산인데, 이걸 잘 활용하기 위한 시스템을 법 개정 통해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