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22조 투입해 파운드리 재진출 선언
美 정부·현지 기업도 합세…삼성·대만 TSMC 겨냥
삼성, 총수 부재로 투자 의사결정 늦어질 수도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반도체 생산라인.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쩐의 전쟁이 가속화하고 있다. 연초 올해 설비투자에 최대 280억달러(약 31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대만 TSMC에 이어 미국 인텔이 200억달러(약 22조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다.

세계 1위 파운드리 대만 TSMC를 잡기 위해 갈 길 바쁜 삼성전자에 새로운 경쟁업체의 등장은 부정적일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이미 세계 파운드리 1, 2위를 굳힌 TSMC와 삼성전자와의 기술력 격차를 인텔이 단기간 내 좁히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만 현재 삼성전자가 ‘총수 부재’라는 악재 속에서 적기에 투자를 단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올해 설비투자액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33조 vs 31조 vs 22…반도체 쩐의 전쟁 가속화

인텔이 지난 23일(현지시각)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밝힌 투자 금액은 200억달러다. 인텔은 오는 2025년 파운드리 시장이 1000억달러(약 113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앞서 TSMC는 지난 1월 실적발표에서 올해 설비투자액이 최대 28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시장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삼성전자는 올해 구체적인 설비투자액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전년보다 46% 늘린 32조9000억원을 쏟았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로, 연초 TSMC의 행보를 고려해 올해 역시 역대급 투자를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올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시설투자 규모를 280억달러로 예상하며, TSMC(275억달러)보다 약 5억달러가량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장 부회장은 지난 17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고객사 수·생산능력 등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효율적인 투자를 적기에 마련하겠다"고 했다.

반도체 제조사의 공격적 투자 행보는 슈퍼사이클(장기호황)에 진입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다. 2017~2018년 반도체 호황을 끝으로 반도체 제조사들이 2019년 설비 투자를 줄이면서 최근 수급 불균형을 불러왔다. 반도체 생산라인을 신설해 양산하기까지는 최소 2년이 걸리는데, 현재가 이 시차에 딱 맞물린 셈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올해 세계 반도체 장비 투자 규모는 740억달러(약 82조원) 수준으로 전년보다 16%가량 증가하고, 내년에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 세계 각국 반도체 전쟁…美 정부 등에 업은 인텔

"반도체는 21세기 편자의 못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반도체와 자동차용 배터리 등 4개 품목의 공급망 검토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반도체를 말발굽 편자의 못에 빗댔다. 반도체가 국가안보에 직결하는 핵심 품목임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아시아로 넘어간 반도체 주권을 미국이 되찾겠다는 계산이 깔렸다는 평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재건을 발표했다. 지난 2018년 인텔은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파운드리 사업을 대폭 축소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파운드리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사업 재진출 선언에 나선 것이다. 팻 겔싱어 인텔 CEO는 "인텔이 돌아왔다(Intel is back)"고 했다.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진출은 기존 파운드리 업계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TSMC와 삼성전자를 정조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현지 기업들 역시 힘을 합치는 모양새다. 겔싱어 CEO의 취임 후 첫 공식석상에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아르빈드 크리슈나 IBM CEO 등이 함께 협업을 강조하고 나섰다. 인텔은 TSMC와 삼성전자의 핵심 고객사인 구글, 아마존, 퀄컴 등도 인텔의 사업을 지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존 고객사들이 인텔로 공급처를 교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지나 러만도 미 상무장관은 "미국 기술혁신과 리더십을 지키고 국가 안보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픽=이민경

◇ "경쟁사 늘어나 부정적" vs "기술 격차 좁히기 쉽지 않아"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가 56%로 1위를 기록했다. 이어 삼성전자(18%), 대만 UMC와 미국 글로벌파운드리가 각각 7%, 중국 SMIC(5%) 등의 순이다.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이 삼성전자에 미칠 영향을 두고는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경쟁사가 늘어나 부정적일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오랜 기간 쌓아온 노하우를 인텔이 단기간 내 따라잡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임예림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진출은 신규 파운드리 공급사가 추가된다는 점에서 TSMC, 삼성전자에 부정적일 것"이라며 "향후 미국과 유럽 지역 공장 증설로 고객사를 확보할 예정이다"고 분석했다.

반면 인텔의 공정을 고려하면 TSMC, 삼성전자의 기술력을 단기간 내 좁히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인텔은 현재 1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을 기반으로 하는데, TSMC, 삼성전자는 5㎚ 공정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3㎚까지 좁히기 위한 개발에 착수한 상태다.

특히 5㎚ 이하 첨단공정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네덜란드 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장비 확보가 필수다. EUV는 ASML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 공급하고 있는데, 10㎚ 이하 반도체 생산을 위한 핵심 장비로 꼽힌다. 1대당 가격은 약 1800억원으로 알려졌지만, 지난해 출하된 물량은 31대에 불과하다. 생산량이 한정적이라는 의미다. 올해는 40~50대 생산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미 내년 치 물량까지 주문을 모두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현재 삼성전자가 이재용 부회장 부재로 제때 반도체사업 방향을 설정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 변수로 꼽힌다. 연초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실적발표 이후 이뤄진 컨퍼런스콜에서 "3년 내 유의미한 인수·합병(M&A)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최근 주총에서 김기남 부회장은 "대내외적으로 불확실한 상황이어서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총수 부재로 의사결정 시스템이 마비된 상황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