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위기 맞아 "독점 폐해" 우려에도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 허용
국내 시장 점유율 70~80%… 20여년간 사실상 독점 체제 구축
나머지 국내 업체, 자금 사정 악화→투자 위축→경영 위기 반복

친환경차·자율주행·모빌리티 서비스 확산으로 시작된 '카마겟돈(carmageddon·자동차 산업 대혼돈)'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국 자동차 산업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제조뿐 아니라 정비·판매·자재 등 전후방 효과가 커 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자동차 산업이 국내 경제의 든든한 허리 산업으로 자리 잡으려면 국내 자동차 산업의 구조가 어떻게 개선되고 업체의 구조조정이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짚어본다.[편집자주]

자동차 산업의 격변기를 맞아 글로벌 업체들이 미래 모빌리티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지만, 한국 자동차산업은 총체적인 위기에 흔들리고 있다. 현대차(005380)·기아와 함께 한국의 차 산업을 지지해온 한국GM·르노삼성·쌍용차 등 3개 완성차 업체는 미래에 대한 대비는커녕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르노삼성과 쌍용차는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으며 벼랑 끝으로 내몰렸고, 한국GM은 지난해까지 7년 연속 적자에 허우적대고 있다. 현대차·기아라고 마냥 사정이 좋지는 않다. 정부의 세제 지원 덕분에 내수 시장에서는 선전했지만, 국내 시장 점유율의 상당 부분을 수입차 업체에 내주고 있고 해외 시장에서 판매 실적이 악화되면서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지난해 2월 울산 북구 현대차 공장에서 오전 근무자들이 퇴근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 자동차 생산 성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대차·기아와 국내 3개 완성차 업체는 6년 전인 2015년까지만 해도 455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며 우리나라를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 반열에 올렸다. 하지만 5개 완성차 업체의 생산은 갈수록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2019년에는 한국 자동차 생산량이 10년 만에 400만대를 밑돌았고 지난해에는 350만대에 그쳐 2004년(347만대) 이후 16년 만에 가장 적었다. 글로벌 생산 순위도 중국·미국·일본·독일·인도·멕시코에 이어 7위에 그쳤다.

지난해 예상치 못한 코로나 사태가 자동차 산업을 위축시켰고, 그전에도 미·중 무역전쟁, 중국의 사드 보복 등 국제 정치 이슈가 국내 차 산업에 타격을 줬다고 하지만, 위기를 초래한 결정적인 원인은 고비용 구조 지속, 혁신 실패에 따른 경쟁력 상실이다.

많은 전문가는 한국 차 산업이 외적 성장을 지속하면서도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1998년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하면서 심각한 내수 독점 구조가 형성된 것을 지목하고 있다. 현대차·기아가 한국 차 시장의 70~80%를 점유하는 독점 기업이 되면서 차 산업에서 혁신의 싹이 트지 못했다는 것이다. 23년전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당시 잘못된 판단을 반추하는 것은 차 업계 구조조정 시계가 빨라지는 지금 좋은 오답노트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1998년 12월 1일, 당시 정몽규(왼쪽) 현대차 회장과 유종렬(오른쪽) 기아차 법정관리인이 기아차-아시아차 인수계약을 체결하는 모습.

현대차는 기아차를 인수하면서 국내 자동차 시장 70~80%를 차지하는 독점 기업이 됐다.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공정거래위원회는 독점 우려에도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를 허용했다. 당시 정부와 재계 안팎에서는 현대차가 기아차를 인수하면 명백한 독점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지만, 공정위는 기아차를 회생 불가능한 회사로 보고 현대차와 결합하면 효율성이 좋아진다며 이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당시 현대·기아·대우자동차로 구성된 국내 자동차 삼각구도가 무너졌다.

하지만 당시 기업 결합에 따른 이익이 독점 폐해보다 클 것인지는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정부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를 추진했다.

그래픽=이민경

현대차의 기아차 인수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내수 시장에서 총 134만대를 판매해 점유율 83%를 기록했다. 수입차를 포함해도 현대차·기아의 내수 점유율은 71%다. 현대차·기아 노조는 거의 매년 파업을 반복하면서 높은 수준의 임금 인상을 받고, 사측은 자동차 판매가를 지속적으로 올리고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사들을 상대로 해마다 5~10% 정도 납품단가를 인하해 소비자와 협력사에 비용을 전가하고 있다. 정상적인 자동차 산업 생태계가 조성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독점기업의 전형적인 횡포가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압도적인 점유율은 생산은 물론 판매·정비 등 전후방 산업의 경쟁력도 갉아먹고 있다. 한 완성차 회사 관계자는 "판매·정비 등 국내 차 업체의 고객서비스 품질은 낮은 수준인데, 이는 서비스를 개선하지 않아도 현대차·기아는 국내에서 많은 자동차를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시장의 80%를 점유한 현대차·기아가 서비스 품질을 높이지 않으니 다른 업체도 굳이 서비스 수준을 올릴 유인이 없다"라고 말했다.

경쟁이 필요 없는 독점 시장의 폐해는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연구·개발(R&D)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지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기준, 현대차·기아의 R&D 투자액은 4조원으로 독일 폭스바겐의 25% 수준, 일본 도요타의 40% 수준에 그친다. 매출액 대비 R&D 비중도 2.8%에 불과해 폭스바겐(5.7%)과 도요타(3.6%)보다 크게 떨어진다.

지난 2013년 노조의 파업으로 멈춰선 현대차 울산3공장 생산라인.

수요를 독점한 현대차·기아 때문에 시장 구조가 왜곡되면서 국내 자동차 업체의 혁신 역량은 갈수록 줄었다. 현대차·기아가 내수를 잠식하는 사이 국내 시장에서 브랜드 경쟁력을 상실한 3개 업체의 입지가 좁아졌고, 이들은 자금 사정 악화, 투자 위축, 경영 위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해 겪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대차·기아의 지나친 독점 구조가 형성되면서 나머지 국내 차 업체들은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떨어져 단순한 위탁 생산 기지로 전락했다"며 "수요 독점이 한국 차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고질적인 문제이지만 마땅히 해결할 방법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산업이 탄탄하게 자리 잡은 일본, 독일, 미국의 경우 한 업체가 내수 시장을 독점하는 경우는 없다. 일본 도요타의 내수 점유율은 40% 정도고 유럽에서 폴크스바겐의 점유율은 20%대 수준이다. 미국 내수 시장에서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의 점유율도 낮은 수준이다.

국내 다른 기간산업을 봐도 자동차 산업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독점이 이뤄진 시장은 거의 없다. 자동차처럼 기간산업이자 소비재 특성을 가진 정유나 통신 산업 등은 최소 3~4개 업체가 경쟁하는 시장이 형성돼 있다.

지난 2007년 현대차가 파업에 들어가면서 차량의 주요부품을 납품하는 한 협력업체의 생산라인도 멈춰섰다.

정유 산업은 SK이노베이션(096770)·GS칼텍스·S-Oil(010950)·현대오일뱅크 등 4개 정유사가 시장을 나눠먹고 있다. 시장 점유율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 기업 모두 더 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생산성을 높이고 휘발유 품질을 높이기 위해 상당한 투자를 단행한다.

통신 산업도 마찬가지다. SK텔레콤(017670)·KT(030200)·LG유플러스(032640)가 투자를 확대하며 경쟁한 결과 통화·데이터 품질은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과점 업체 간 경쟁은 제품과 서비스 가격을 한 업체가 지나치게 인상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막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앞으로 더 큰 위기가 우려된다는 점이다. 그동안 내연기관차 중심이던 글로벌 자동차 산업은 전기차, 자율주행 등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 미래차와 모빌리티 서비스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려면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하면서 기술력을 쌓고 글로벌 무대로 향해야 하지만, 생존의 위기에 몰린 국내 완성차 업체들은 미래 모빌리티 시장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상황이 유지되면 미래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차·기아의 독식과 그에 따른 폐해는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학계 관계자는 "현대차·기아의 독점에 따라 발생하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한국GM·르노삼성·쌍용차 등 국내 완성차 업체의 회생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지난 몇년 간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나머지 3개 업체를 제대로 살리려는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정부가 현대차·기아만 살아남으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자동차 산업 경쟁력을 회복하는데 실기(失期)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