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 내각 하원의원 출신 글로벌 리더 델핀 오
"어린 시절, 한국인 아버지가 '봉사 정신' 심어줘"
"마크롱 실책 있지만, 오바마처럼 긍정 역할 했다"
"프랑스는 미국과 달라, 트럼프 같은 리더 안 될 것"
"기업 이사회, 국회 등 여성 30% 넘으면 변화 일어나"
"프랑스, 여성 동성애 커플에 시험관아기 허용"

프랑스 하원의원을 거쳐 UN 세대평등사무총장으로 발탁된 델핀 오(한국명 오수련, 36세). 2021년 한국이미지상 징검다리상 수상자로 결정되어 방한했다.

DC의 ‘원더우먼’과 마블의 ‘캡틴 마블’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진실의 올가미를 쥐고 부활한 원더우먼? 범우주적인 에너지를 자랑하는 캡틴 마블? 질문이 틀렸다. 그들은 싸우지 않는다. 불합리라는 빌런을 상대하기 위해 연대할 것이다.

갈등을 부추기고 싸움을 붙여 승자와 패자를 가리던 시대는 지났다. 이 시대의 슈퍼파워는 제압이나 흡수 통합이 아니라 협력과 협업이며, 히어로들은 각자가 주인공인 시나리오 안에서 고유의 매력으로 서로의 성장을 도울 뿐이다. 보이지 않았던 ‘여성의 세계’가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남성 디폴트’ 세계의 다양성 룰이 바뀌고 있다.

델핀 오를 소개한다. 오바마와 마크롱의 열렬한 지원을 받으며 정치 무대와 국제무대에 데뷔한 젊고 파워풀한 리더. 2017년 마크롱 정부가 출범할 때 프랑스 정계의 핵심 인물로 활약한 하원의원이자 현재 UN 세대평등 포럼 사무총장. 한국계 프랑스인인 그는 CICI(한국이미지케이션 연구원)에서 한국의 위상을 알린 공로자에게 주는 한국이미지상 징검다리상 수상자로 선정돼 한국을 방문했다.

블랙 한복 저고리에 레오파드 스타킹, 롱 부츠를 신고 나타난 델핀은, 임신 4개월인 채로도 피로한 기색 없이 인터콘티넨탈 호텔을 씩씩하게 누비고 다녔다. 다부진 표정에서 자신감과 생명의 기운이 흘러넘쳤다. 나는 몇 해 전 같은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오영석 박사(전 카이스트대 교수)와 인사를 나눴고, 이듬해 델핀의 오빠인 세드릭 오(현 프랑스 디지털경제장관)를 인터뷰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엘리제궁 만찬에서 ‘오씨 남매’를 문재인 대통령 부부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민자와 여성, 소수자, 청년을 앞세워 젊은 정치를 시작한 마크롱 정부는 비판적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고, 델핀은 현재 집권 정당 앙마르슈를 나와 글로벌 외교 무대와 여성 인권 현장을 뛰고 있다.

오늘 CICI 징검다리상 수상은 한국인 입양아 출신 프랑스 장관이었던 플레르 펠르랭, 기 소르망, 르 클레지오에 이어 프랑스인으로는 그녀가 네 번째 수상자였다. 그는 한국과 프랑스가 문화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데 감사함을 느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받은 상을 내가 받다니! 꿈만 같아요"라며 활짝 웃었다.

파트너와 함께 책 읽으며 시간을 보낼 때 가장 행복하다는 델핀 오.

델핀을 만나기 전에 CICI 이사장인 최정화 교수는 내게 국제 무대에서 그녀가 얼마나 주목받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세계 최고 지성이 모이는 파리고등사범학교, 하버드 케네디스쿨을 나와 중동 지역 전문가로 활약한 그는 20대부터 오바마 재단이 선정한 차세대 유럽 리더 10인에 선정됐다. UN 여성기구와 프랑스가 주도하는 UN 세대평등포럼은 전 세계 여성 리더가 모이는 국제 회의로 이방카 트럼프가 오래도록 열망했던 자리다.

-작년 겨울, 나는 마크롱 정부의 브레인이자 당신 오빠인 세드릭 디지털 경제 장관을 인터뷰했습니다. 그가 "델핀이 공부를 더 잘했고 아버지가 덜 엄격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델핀이 덜 한국적이다"라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웃으며 발끈하며)제가 더 좋은 학생이었고 아버지 말을 잘 들었어요. 오빠는 엄격한 교육이 더 좋은 성적을 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매우 한국적입니다. 늘 내 절반이 한국이라고 생각해왔어요. 2007년에서 2008년까지 1년 동안 한국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저는 한국말을 잘 못하고 할머니는 프랑스어를 잘 못했지만, 크게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에게서 무엇을 배웠나요?

"회복탄력성! 역경을 딛고 튀어 오르는 힘이랄까요. 할머니는 한 살 된 아들을 데리고 6.25 전쟁 직전에 국경을 넘었고 담배 공장을 다니며 홀로 삼남매를 키웠습니다. 나는 살면서 할머니처럼 전쟁과 죽음과 끝을 겪지 않았지만, 그녀의 투지와 회복력을 이어받았어요. 그분을 존경하고 내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가족은 제가 할머니를 닮아 고집이 세다고 하죠(웃음)."

세드릭 오와 델핀 오 남매는 이미 프랑스 공직 엘리트 사회에서 다른 기질과 활약으로 유명하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과학자로 살았던 그의 아버지 오영석은 ‘어떻게 자녀를 인재로 키웠는가'라는 책에서 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피아노를 배울 때도 두 아이의 성격은 확연히 드러났다. 세드릭의 피아노 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웠으나 델핀의 피아노 소리는 힘이 있고 메트로놈처럼 모든 게 정확했다.’

-당신 남매가 친할머니 여은희에 대한 책을 집필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인이 알제리 선조를 찾아가듯 당신들의 핏줄을 추적하겠다고요. 진행 상황은 어떤가요?

"세드릭과 함께 계획하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 30~40년 전 북한 자료를 얻기 어렵고, 가족 중에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요. 하지만 할머니의 많은 DNA는 이미 내 몸속에 저장돼 있죠(웃음)."

아버지 오영석(전 카이스트대 교수) 박사와 그의 칠순에서 한복을 입고 축시를 낭송하는 오남매.

-몇 년 전 하원의원 시절에 한국 국회에서 청년들과 젊은 정치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정치는 어떻게 세대교체가 가능했나요?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컸던 시절이었어요. 20~30년 동안 같은 정치인이 등장하는 데 대한 사회적 피로가 컸죠. 젊은이들의 요구가 거셌고 그 힘의 물줄기로 새로운 정당 앙마르슈(En Marche 전진하는 공화국)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캠프에 간이침대를 놓고 스타트업 같은 분위기로 일했어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청년이 모여들었고, 거기에 기존의 정치인들도 포용해서 기반이 만들어졌습니다."

2017년 당시, 앙마르슈 정당은 정치 경험 없는 2만여 명 시민들의 이력서를 인터넷으로 받았고, 남녀 똑같은 비율로, 기성 정치인과 신인을 절반씩 공천했다. 마크롱은 ‘여성들은 경력 없다고 시간 없다고 자기 검열하지 말고 더 많이 정치에 참여해달라'고 독려하는 동영상을 찍어 SNS에 올렸다.

영국의 브렉시트를 눈앞에서 보며 "자신들의 미래를 부모 세대가 결정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프랑스 청년들은 2017년 대선과 총선을 ‘68운동’의 세대교체 흐름으로 이어받았다. 변화의 물살은 거셌고 하원의원 중 75%가 초선으로 물갈이됐다. 전체 연령은 10세 이상 낮아졌으며, 여성은 전체의 39%로 상승했다. 델핀은 파리에서 가장 가난한 구역 중의 하나인 19구에 출마했다.

-프랑스의 세대교체는 확실히 유럽 연합에 새바람을 일으켰지요.

"한국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더 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참여하길 바래요."

-한국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여전히 여성 정치인의 옷차림이 가십이 되고, 미투 운동으로 인한 정치적 입장 차이도 조정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도 이전에 여성장관이 있었지만 2017년 이후에야 분위기가 바뀌었죠. 하원이 40% 여성으로 채워진 후에야 더 많은 여성이 옷차림 시비에서 자유로워졌어요. 숫자가 많으면 유치한 모욕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해요. 그래서 ‘남녀동수법'이 중요해요. 한국의 부산 시장과 서울 시장의 추문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더 많은 여성이 말할 수 있게 된 변화는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변화의 계기는 숫자인가요?

"(단호하게)그렇습니다. 숫자입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지요. 훌륭한 지능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에서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났나요?

"인구 집단에서 30%가 됐을 때 상황이 바뀌어요. 국회의원 구성을 비롯한 성비가 30%를 넘는 순간 균형이 뒤집히고 집단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10명 중의 1명은 안 되죠. 3명 이상이 되면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프랑스는 2012년에 ‘남녀동수법'이 제정됐어요. 기업 이사회, 공공기관, 국회 등 구성원의 40% 이상을 여성으로 채워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된 후에 변화가 일어났죠. 안 지키면 큰 벌금을 물게 되니까요."

델핀 오는 ‘남녀 균형, 연령 균형, 세대 균형이 곧 사회 정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름과 소수를 포용할수록 혁신과 진화가 일어나며 그것은 윤리 이전에 지구생태계의 원리다.

"완전한 균형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여성의 참여가 늘어났지만 아직 여성 총리, CEO, 국회의장 등 리더의 자리에 여성의 역할이 절실해요. 프랑스의 40대 대기업 수장 중 여성 CEO도 한 명에 불과하죠."

-균형을 찾아가는 것에 대해 프랑스 정계에 반발은 없었나요?

"전 세계 어디든 남성 중심 조직의 반발은 심해요. 남성 정치인들은 ‘역차별'이라고 소리를 높였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랫동안 배제당했던 능력 있는 여성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뿐입니다. 지금 외교 대사로 일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40%를 채우려고 해요. (미소지으며)남성들의 질투에 굴하지 않고 인재를 발탁할 생각입니다."

-불의에 민감한 건 기질인가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도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어요. 하지만 커서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나조차도 학습된 편견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놀랐어요.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조차도 여성은 남성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더군요. 하버드를 나와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후에는 제 3세계 여성 인권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체감했습니다. 프랑스가 40%의 하원을 여성으로 채웠지만, 여전히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여성은 임금 차별과 각종 폭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6월에 열리는 UN 세대평등포럼에서 각국의 리더들과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거예요. 한국도 외교부, 여성가족부 장관 등이 참석해주길 요청했어요. 50년 전에 비하면 교육, 임금 등에서 많은 것이 나아졌지만, 코로나 이후 불평등은 더욱 심화했어요. 2008년 금융위기 때는 금융, 자동차 등 남성의 일자리가 타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관광, 패션, 외식 등 여성의 일자리가 더 많이 사라졌죠."

델핀은 차분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성은 바깥일과 가사 일이라는 이중 부담을 지게 됐어요. 20년 동안 가정과 일의 균형을 맞춰왔는데, 코로나로 급 후퇴했죠. 가정 폭력은 30% 증가하고, 개발도상국의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1,100만 명의 소녀들이 강제 조혼을 당하고 더이상 학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됐죠."

팬데믹의 그늘은 깊었다. 그는 자주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현상을 보는 눈은 매서울 정도로 이성적이되 약자를 향한 마음은 뜨거웠다.

-문득 궁금하군요. 10대 20대 30대를 거치면서 당신에게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첫째 사건은 2001년에 터진 9.11테러. 고등학교 3학년 때 그 사건을 접했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두 번째 사건은 2008년 오바마 대통령 당선이죠.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고 큰 진전을 이뤄냈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당연히 2017년 마크롱 당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18살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일, 2014년에 아프가니스탄과 2015년에 이란을 방문했던 일이 삶의 중요한 분기점이 됐어요. 중동의 위기 상황을 처음 알게 됐고, 세상과 고립된 곳의 복잡한 문제를 이슈화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프랑스에서 의원 생활을 하면서 실제적 변화를 이뤄낸 것도 제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정책적으로 어떤 변화를 끌어냈지요?

"저 혼자가 아니라 당이 함께 끌어낸 변화가 몇 가지 있어요. 학교 개혁 정책을 통해 프랑스의 빈곤 지역 1, 2학년 어린이들의 정원을 25명에서 12명으로 제한했어요. 취약 계층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 읽고 쓰는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고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주간 주어지던 남성 출산 휴가도 1개월로 연장했어요. 남녀 커플에게만 허용되던 시험관 아기는 여성 동성애자 커플에게도 합법화됐고요."

프란치스코 교황과 환담중인 델핀.

-그러나 개혁의 아이콘이었던 마크롱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현재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고통을 호소하는 중산층의 반발과 최근의 코로나 대처의 미숙함 때문인데요. 어떻게 보고 있지요?

"마크롱과 함께한 것에 후회는 없어요. 우리는 새로운 젊은 지지자들과 희망의 정치를 꿈꿨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희망도 있었기에 실망하는 것도 당연하죠. 우린 인간이고 결함이 있어요. 권력자로서 마크롱이 현명하지 못한 선택도 했습니다. 그러나 2017년의 승리로 프랑스는 유럽 정치의 낡은 흐름을 바꿨어요. 그간 마크롱의 실책에 대한 반발도 있지만, 오바마가 미국의 이미지를 쇄신했듯이 마크롱도 그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바마 이후에 트럼프가 나왔고 세계의 민주주의는 후퇴했지요.

"오바마 시절은 변화가 빨랐고 공격받는다고 느끼는 층이 많았어요. 그 반작용으로 트럼프 지지자들이 생겼고요."

-프랑스도 그런 우려는 없나요?

"약간은 있지만 미국만큼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은 인구 구성이 달라요. 미국에서 시위를 일으키는 공격적인 인구집단이 프랑스에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덜 극단적이고 덜 과격해요. 그러나 포퓰리즘 정치인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2017년 프랑스 하원의원에서 UN 세대평등포럼 사무총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지금까지, 당신은 청년기를 굉장한 드라마틱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길인가요?

"정치 참여는 예상해본 적이 없어요. 마크롱과 앙마르슈 정당에 설득돼서 하루아침에 삶이 변화됐죠. 민간에서 공공의 삶으로 넘어온 후 사람들은 마크롱의 정책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어요(웃음). 사실 정치인은 특권을 누리는 경험입니다. 오래 있으면 현실과 동떨어지죠."

엘리트 출신 정치인들은 오래 그 지위에 있을수록 더 많은 특권을 누려도 된다는 착각에 빠질 뿐이라고 했다. 그 점에서 델핀 오와 세드릭 오의 생각은 일치했다. 공직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 참여’일 뿐, 임무를 완수하면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

프랑스와 한국이 결합된 다문화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철저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졌다는 델핀.

-공직과 사회 헌신에 대한 신념은 어떻게 생겼나요?

"예전부터 사회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좀 강했던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부모님께서 심어주셨어요. 오빠와 나는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직업과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건 특권이고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해요.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하죠."

-어릴 적 꿈은 뭐였지요?

"(활짝 웃으며)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어요. 4살 때부터 시작했는데 청소년기에 그만뒀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더 많은 재능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높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도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발레댄서들의 고된 훈련’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델핀의 끈기와 투지가 발레 클래스에서 다져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지성들이 모이는 파리고등사범학교(ENS)와 하버드 공공정책 대학원 케네디 스쿨을 나왔어요. 공부를 좋아했나요?

"하하. 학교를 좋아했어요. 모범생이었고 지적인 호기심이 굉장히 강했어요. 아버지가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어주셨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죠."

이란에서 인터넷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던 델핀은 하원의원이 되면서 ‘이익충돌'을 피하기 위해 언론사 발행인 직을 내려놓았다.

-청년기의 배움은 자기 질문을 갖기 위한 수련의 과정이죠. 요즘 당신은 어떤 질문을 갖고 있나요?

"2년의 시간 동안 올 6월에 열릴 UN 세대평등포럼을 준비했어요. 첫 질문은 ‘그다음 미션은 무엇일까?’예요. 두 번 째 질문은 ‘코로나 위기 속에 더 평등한 세상이 왔을까?’죠. 현재 인류의 최우선 과제는 백신과 보건이에요. 그 와중에서도 ‘다양성과 사회적 균형'이라는 이슈를 놓쳐서는 안 되고 내 직업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에요. 나는 지금 임신 중이고 아이를 기다리고 있죠. 폭력적이고 험난한 세상에서 이 아이를 어떻게 보호할까? ‘내가 투쟁했듯 이 아이도 어떻게 하면 투쟁할 용기를 갖게 해줄까’를 고민 중입니다."

보호받는 약자인 동시에 투쟁하는 한 인간으로서 ‘배 속 아이’를 존중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는 현재 결혼하지 않고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다. 파트너는 두 번째 아이, 그는 첫 아이다. "우리는 육아 분담을 평등하게 하기로 약속했어요. 파트너와 내가 동일한 기간 동안 육아 휴직을 하기로 했죠."

-아이를 가진 후 당신의 인생 플랜도 변화를 맞았나요?

"물론. 해외에서 활동하는 외교 관련 일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더 많은 날들을 여행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책을 읽으며 보내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지닌 가장 큰 재능은 무엇인가요?

"(미소 지으며)저는 제가 좋은 리더라고 생각해요. 성공을 앞당기는 리더라는 말은 아닙니다. 제게는 함께 일하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재능이 있어요. 때론 엄하게 하지만 친밀하게. 리더와 구성원 간에 관계가 좋아야 일이 돌아가죠. 젊은 구성원들에게 항상 묻고 귀를 기울이고, 청소하시는 분께도 잊지 않고 감사를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시민으로 성장한 한국의 밀레니얼들에게 조언을 부탁합니다.

"본국을 떠나 해외로 나가세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느끼고 큰 그림을 그려보는 게 중요합니다. 책에서만 배울 수는 없어요.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 약자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질문해야 해요. 그게 삶이에요. 특별히 남성들은 자신들이 주류였던 세상에서 빠져나와 더 다양한 작은 문을 열고 배워가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