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정유사, 이라크에 20억달러 원유 선불
선적시기·수출 목적지도 '中 맘대로' 설정
美, 中 통신사 이어 정유사도 상장폐지 고려
"산유국에 원유 담보로 대출...영향력 키워"

이라크의 한 유전에서 원유 시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중국기업 상장폐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목표는 '빅 3' 석유업체들이 될 것 같다."

블룸버그통신 인텔리전스의 헤닉 펑 애널리스트는 3일(현지 시각)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중국의 3대 통신사 상장 폐지에 이어 중국 3대 정유사인 CNOOC(중국해양석유)와 시노펙(중국석화), 페트로차이나도 퇴출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이르면 당장 다음 주부터 해당 업체들의 상장 폐지를 위한 절차가 시작될 수 있다"고도 했다.

싱가포르 투자은행 UOB 케이히안 홍콩법인의 스티븐 렁 이사도 같은 날 블룸버그통신에 "앞으로 더 많은 중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상장 폐지될 것"이라며 "특히 중국 군(軍)에 중요도가 큰 에너지산업이 다음 순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뉴욕증시 퇴출에 따른 중국 기업의 실제 타격은 예상보다 크지 않겠지만 이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이들 기업을 목표로 한 건 중국 군에 에너지산업의 중요도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11월 중국 기업들을 미 증시에서 퇴출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중국 군과 연계된 기업에 대해 미국인의 투자를 막아 해당 기업을 압박하겠다는 목적이다. 미 국방부가 작성한 35개 기업 블랙리스트에는 중국의 3대 정유사도 포함됐다.

◇휘청이는 산유국에 돈 빌려주고 자산 매입…"中 세력 확장"

실제 중국은 코로나19 여파 속에도 글로벌 석유시장 내 세력을 키우고 있다. 블룸버그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날 이라크 석유수출공사(SOMO)는 중국 정유사와 원유 선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대상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블룸버그는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국유 방산업체인 노린코 산하 정유기업인 '젠화 오일(ZhenHua Oil)'이라고 전했다.

이번 계약의 골자는 이라크가 올해 7월부터 5년 간 중국에 매달 400만배럴 규모의 원유를 공급하되 1년치에 대한 선불을 받는 것이다. 해당 금액은 20억달러(약 2조1700억원) 정도다. 업계에선 사실상 중국이 석유 거래 형식으로 이라크에 1년간 '무이자 대출'을 해주는 구제금융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원유 수출은 이라크 정부 수입의 90%를 차지할 만큼 절대적이다. 코로나19에 따른 유가 폭락으로 재정난에 빠진 이라크가 최초로 선불제 계약을 맺은 이유다. 통상 중동산 원유에는 '재매각 금지' 조건이 붙는다. 그런데 이번 계약으로 중국은 원유 선적 시기와 수출 목적지를 임의로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중국 이외 다른 곳으로 목적지를 정한 뒤 원유를 되팔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막대한 수요 증가를 앞세워 산유국을 상대로 자산매입도 늘리고 있다. 블룸버그는 지난해 말 CNOOC와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이라크 남부 바스라주 소재 서(西)쿠르나 유전의 엑슨모빌 소유 지분을 인수하려 한다고 보도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재정난이 심해진 산유국에 돈을 빌려주거나 지분을 인수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이다.

FT는 "이라크가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 중국 정유사들이 단기 구제책으로 원유를 사들였다"며 "중국으로서는 수익성이 상당한 계약을 확보했다"고 전했다. 특히 최근 원유가격이 상승세를 보이면서 중국의 영향력은 한층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