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단골 만찬주 문배술 이기춘 대표-이승용 실장 부자 2014년 유리병 채택하면서 젊은층의 반응 좋아, 전국 1000곳 이상 주점에서 취급 잡곡인 조, 수수로 만들지만 문배 향 난다고 해서 ‘문배술’로 이름지어 강한 향 부드럽게 하기 위해 2007년부터 전통방식(상압) 아닌 감압증류방식으로 증류 장욱진 작품을 술병 라벨에 입히는 등 콜라보 작업 활발…”언젠가 대동강물로 문배술 빚을 것”

"문배술은 2014년부터 도자기병에서 튜명 유리병으로 바꾸면서 취급 주점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지금은 전국에 1000곳 이상 되지 않나 짐작합니다. 그만큼 젊은 층의 반응이 좋아졌습니다. 또 2017년부터는 품질 개선을 위해 매년 2억~3억원을 생산설비에 투자하고 있습니다."(문배술 이승용 실장)

"천년을 이어온 문화유산인 문배술 기능보유자는 매출을 크게 키우는 것보다 보전 전수가 더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아들인 이승용 실장은 전수자로서 나무랄 데가 없다. 문배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술을 훨씬 젊게 만들고 있다."(문배술 이기춘 대표)

남북정상회담 단골 만찬주인 문배술을 만드는 문배술 이기춘 대표(오른쪽)-이승용 실장 부자. 가운데 액자 속 인물은 이기춘 대표의 부친인 이경찬 명인(작고). 북한 최대 기업이었던 평촌양조장 대표였다.

남북정상회담 만찬 식탁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술인 문배술은 고려시대부터 임금에게 진상하는 술이었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고려 태조 왕건 때에 신하들이 좋은 술을 진상했는데, 문배술을 빚어 진상한 신하가 가장 큰 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후 문배술은 임금은 물론 고려시대 문인들이 즐겼으며, 10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는 전통주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술 중 하나인 문배술이 요즘 점점 젊어지고 있다. 도자기병 일색이던 패키지가 투명 유리병으로 바뀐 것은 이미 오래 전. 최근에는 장욱진 화백 작품을 문배술 유리병 라벨에 새긴 ‘아트 콜라보레이션'을 선보였다. 장욱진 화백의 ‘향토성'과 천년을 이어온 문배술의 ‘전통성'을 접목시킨 이벤트였다. 장욱진 화백의 ‘나날이 좋은 날’ 작품이 라벨에 입혀진 문배술 1만병은 예상보다 4~5개월 앞서 내년 2월쯤 조기소진될 전망이다.

문배술은 조만간 DMZ(비무장지대) 물로 만든 문배술도 선보일 예정이다. 경기도 김포에 생산공장을 둔 문배술은 본래 평양에 양조장이 있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평양정상회담 때, 남한에서 가져온 문배술을 보고, 김 위원장이 "문배술은 대동강물로 만들어야 진짜배기"라고 한 언급은 지금도 문배술에 ‘장기 과제(대동강물로 문배술 빚기)’로 남아 있다.

2년만에 다시 찾아간 문배술 양조장은 외관이 근사하게 바뀌어져 있었다. 지붕도 없이 바깥에 전면이 거의다 노출돼 있던 증류탱크는 깔끔하게 외관공사를 마쳤으며, 양조장 앞마당 한쪽에 화덕과 나무데크를 설치, 문배술을 소주고리에 내리는 술빚기 시연은 물론 10여명의 인원을 초청, 각종 요리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이승용 실장은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다는 가정 하에서이지만 소수의 인원을 초청해서, 전통 소주고리에서 내린 문배술과 그술에 어울리는 음식을 제공하는 행사를 내년부터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문배술은 메조와 찰수수로 빚은 증류주다. 쌀증류주가 대부분인 국내 증류주 시장에서 드물게 잡곡만으로 만든 거의 유일한 전통주다. 배를 넣지 않았지만, 문배(돌배)나무 과일향이 난다고 해서 문배술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평양을 비롯해 북한지역에서 만들어져온 문배술은 6.25전쟁을 계기로 남한으로 생산지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서울에서 문배술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부터다. 1955년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곡식으로 만든 술 생산이 전면 금지됐기 때문이다. 이기춘 대표의 부친 이경찬 명인(작고)이 1987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지만 4년 뒤 주세법이 개정되고 나서야 문배술 생산이 시작됐다. 이기춘 대표는 문배술의 4대 전수자다. 2003년부터 문배술 양조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아들 이승용 실장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이기춘 대표와 이승용 실장을 김포의 문배술 양조장에서 같이 만났다.

문배술 이기춘 대표는 “국가 문화재인 문배술은 산업화(매출 키우기)보다 전수 보전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 나서도 왜 술을 생산 못했나?

(이기춘 대표)"1987년에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하지만, 상업생산은 하지 못했다. 당시 법이 어땠는가 하면, 술 발효는 할 수 있었지만, 소주고리에서 술이 한방울이라도 떨어지면 그건 주세법 위반이었다. 술 제조법 전수 보전을 위해 문화재청(당시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일년에 한두번씩 시연 행사를 해야했다.

한번은 문배술 제조과정을 동영상 촬영을 하게됐다. 그런데, 우리 술은 발효주인 탁주, 약주가 아닌 증류주가 아닌가? 그런데, 술 증류는 주세법상 위반이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촬영팀은 영화찍는 것처럼 된장, 고추장 든 장독 수백개가 늘어선 영상을 보여줘, 이를 화면으로 본 사람이라면, 마치 장독마다 술(문배술)이 들어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술 발효와 증류는 시험관 정도의 작은 양만 만들었는데, 화면에는 대기업 술회사에서 대량으로 술 만드는 것처럼 화면을 의도적으로 왜곡편집했다.

당시 이 영상을 본 국세청 담당과가 난리가 났다. 문배술이 정부 허가없이 대량으로 술을 생산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결국 우리집 가택수색까지 했다. 물론 나온건 아무것도 없었다. 1990년 국회에서 주세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나서야 문배술을 만들 수 있었다."

-평양에 있던 평촌양조장은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

(이기춘 대표)"북한 최대 기업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남한의 삼성그룹 같은 회사였다. 공장 안에 철로가 깔려 있어 러시아로 문배술이 기차로 수출됐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아버지가 신변 보호를 위해 공장 안에 학교를 지어, 그 학교를 다녔다."

문배술의 5대 전수자인 이승용 실장. 2003년 문배술에 입사, 당시보다 매출을 세배 키웠다.

-문배술은 조, 수수가 주된 재료다. 발효과정을 상세히 설명해달라.

(이승용 실장)"발효는 15일 정도 한다. 메조와 누룩으로 밑술을 만들고, 수수로 덧술을 만든다. 숙성은 6개월. 수수는 찰수수를 쓴다. 약간 찰지다. 미리 넣은 밑술(메조)과 그 다음의 덧술(수수)이 잘 섞이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두번의 덧술을 하는 삼양주다. 두번째 덧술을 하면 발효온도가 많이 오를 때는 30도 이상 넘어가기도 하기 때문에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동온도조절 시스템을 구축, 발효탱크 온도가 29도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하고 있다."

-최근 설비투자를 많이 했나?

(이승용 실장)"2007년에 지금의 김포공장으로 양조장을 옮겨왔다. 1990년에 생산을 시작했는데, 그때 장비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 장비들을 지금껏 잘 활용하고 있 는데, 그러다보니 30년 전의 기후와 발효 조건들이 지금과는 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2017년부터는 생산설비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많을 때는 연간 3억, 적을 때는 1억에서 2억 정도 매년 생산설비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올해도 2억 가까이 투자했다. 조금 더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본격적인 유리병 제품은 언제부터 내놓았나?

(이승용 실장)"예전에 술이 잘 안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고민했던 것들이 ‘왜 우리 술은 명절에만 잘 팔릴까? 술집에서는 문배술이 왜 안 팔릴까?’ 이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문배술을 젊게 만드려고 유리병 제품을 만들었다. ‘유리병 문배술’이 소비자들에게 적잖은 호응을 얻었고 취급 주점도 1000군데 이상으로 늘어난 것으로 안다.

주점에 문배술을 공급하는 도매상 한군데를 예로 들자면, 2013년에 월 출고량이 100만원이 안됐는데, 2017년 이후에는 월 4000만~5000만원 정도로 늘어났다. 50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그만큼 취급 주점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얘기다.

2003년에 문배술 입사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문배술은 너무 올드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서른살이었다. 그러다 2014년에 본격적으로 유리병 제품을 만들었다."

-유리병 제품을 왜 더 일찍 내놓지 않았나?

(이승용 실장)"그 전(2014년)에도 유리병 제품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유리병 제품이 있었다. 초록색병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 시도를 하다가 2014년에 투명색으로 정착했다."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유리병 제품을 만들었다는 얘기인가?

(이승용 실장)"그렇다. 2010년쯤부터 해왔던 고민이 ‘문배술은 마트에는 있는데, 주점에는 왜 취급하지 않나?’였다. 위스키 매출은 마트보다는 업소에서 발생하는데, 왜 문배술은 그게 안되나? 그런 고민을 하면서 음식점들을 많이 다니고, 다른 술들도 많이 마셔봤다. 문배술이 갖고 있는 강한 향은 옛날에는 숨기고 싶었다. 당시 박람회에서 문배술 시음을 해보면 젊은층에서는 ‘너무 독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내가 보는 자리에서 술을 삼키지 않고, 뱉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행사장 시음을 하면 내가 풀이 죽기 일쑤였다.

도자기병은 안에 든 술이 안보인다. 어떤 느낌의 술인지는 따라봐야 알 수 있다. 진작에 투명병으로 못바꾼 것은 시각적으로 너무 강할까봐였다. 독한 술이라는 걸 감추고 싶어했기 때문에 도자기병을 버리지 못했다. 초기에 쓴 유리병도 맑은 투명한 색이 아니라, 초록색병, 반투명 병이었다.

2014년부터는 달라졌다. ‘아예 문배술을 다 보여주자, 문배술의 캐릭터를 숨기지 말고 보여주자'고 영업전략을 바꾸었다. 이게 우리 술을 알리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4년은 문배술이 한단계 도약하는 터닝포인트였다. 도자기병은 술집에서는 거의 취급하지 않았지만, 유리병 제품은 환영받았다. 그 이후부터는 문배술과 음식과의 페어링이라든지 주점 진출도 탄력이 붙었다. 여지껏 시도하지 못했던 이자카야에도 유리병 문배술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문배술 김포공장의 증류기를 이승용 실장이 가리키고 있다. 20톤 규모의 감압증류기다.

-비슷한 도수인 23도, 25도 제품을 내놓는 이유는 뭔가?

(이승용 실장)"23도 제품은 마트용, 25도 제품은 식당, 주점용으로 만들었다. 아직은 마트 매출이 주점보다는 월등히 많아, 23도 제품이 25도 제품보다 다섯배 많이 팔린다."

-2003년 조인 시작했을 때와 지금 매출 차이는?

(이승용 실장)"세배 정도 늘어난 것 같다. 지금은 연간 40만병 정도 팔린다. 금액으로는 30억원 가량 된다."

-전통 증류식 소주는 소주고리에 술을 내리는 상압증류방식을 택한다. 그런데, 문배술이 감압증류방식을 택한 이유는?

(이기춘 대표)"평양의 평촌양조장 시절에 실험실에서 감압증류를 해보기도 했다. 김포공장은 대량생산에 용이한 감압증류기를 설치했다. 문배술 향을 내는데도 감압은 문제가 없다."

(이승용 실장)"대량생산이 감압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소주고리(상압)로 문배술을 증류하는 연구를 매년 하고 있다. 그런데 시대상황이란 게 있다. 문배술이 이전에는 지금보다 향이 진했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강한 향을 못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소 향을 부드럽게 내기 위해서는 상압증류보다는 감압증류가 낫겠다는 판단을 해서, 김포공장 때부터 감압을 쓰고 있다.

또하나 의견이라면 감압을 한다고 해서 그냥 단순하게 감압을 하는게 아니다. 압력 세기 조절을 했다. 감압이라 하면 강제로 공기를 뽑아내 증류탱크 안의 압력을 평상시보다 낮게 하는 것인데, 감압을 하더라도 압력을 어느 정도 낮추어야 문배술 품질이 가장 좋은지가 관건이다. 감압방식이라고 해도 기압을 확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압력조절 포인트를 파악해서 시행하고 있다. 그 적절한 포인트를 아는데 15년 정도가 걸린 것같다. 상압을 했을 때와 비슷한 향을 내도록 노력도 많이 했다. 상압의 장점도 살리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은 좋은 품질의 문배술이 보다 안정적으로 나올 수 있게 됐다."

-최근에 한 설비투자 사례를 들면?

(이승용 실장)"알코올 도수 측정기를 교체했다. 작년 말에 도입했다. 증류한 술을 몇방울 넣으면 정확한 숫자로 도수를 알려준다. 이전에는 주사기 모양의 주정기를 사용했다. 발효탱크에도 온도조절장치를 장착했다."

장욱진 화백 작품을 라벨에 입힌 문배술 콜라보 제품.

-장욱진 화백 작품 콜라보 시장반응(판매)은?

(이승용 실장)"양주 장욱진미술관과 공동 진행했다. 장욱진 화백의 향토성과 천년을 이어온 문배술의 전통성을 접목해, 대한민국의 문화적 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한 협업작업이었다. 장욱진 화백의 ‘나날이 좋은 날' 작품을 문배술 라벨에 입혔다. 콜라보 제품을 연간 만병 생산, 판매하기로 했다. 올해 7월에 출시해서, 일년간 만병에 쓰는 거였는데 지금 추세로는 내년 1~2월에 전량 소진될 것으로 보일 정도로 반응이 좋다. 다른 형태로 콜라보를 계속 진행할 생각이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북한의 대동강 물로 문배술을 만드는 것이다."

-오크통 숙성해볼 생각은?

(이승용 실장)"오크통 숙성도 검토하고 있다. 이미 오크통도 여럿 준비해놨다. 오크통 공부를 더한 다음에 어떤 오크통이 문배술 숙성에 최적인지 실험해볼 참이다. 오크통에 숙성을 하더라도, 문배술 향을 잘 살릴 숙성기간은 얼마인지 등등을 연구할 생각이다. 오크통 숙성을 할 경우, 3년 정도는 숙성할 생각이다."

-양조장 개방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이승용 실장)"업무량이 많은데 비해 직원은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집중적으로 일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낸뒤 양조장을 개방할 생각이다. 외부에 개방할 준비도 어느 정도 하고 있다. 전시설도 새로 꾸미고 있는 중이고, 앞마당에 나무데크와 화덕도 만들어 놓았다. 내년에는 ‘내 나름대로의 찾아오는 양조장' 이벤트를 하고 싶다. 가령, 1박2일 일정으로 4~5명, 최대 8명이 참가하는 작은 행사도 생각하고 있다. 내가 직접 제품 설명과 시음을 진행하고, 문배술에 어울리는 요리를 쉐프가 현장에서 내놓은 식이다. 나중에 투자 여력이 생기면, 여휴 부지를 아늑하면서도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이기춘 대표는 “문배술의 남북공동생산을 위해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문배술이 만찬주로 선정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문배술 남북공동 생산이 무산된 비화를 소개해달라.

(이기춘 대표)"문배술 남북공동 생산은 청와대 관심 사안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물을 가져와서 남한에서 술을 만든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청와대 지시로 북한을 방문한 적도 있다. 국정원 직원들과 개성공단 통해 평양으로 갔다. 북한 사람들은 이 사업을 대동강 물장사 하듯이 생각했다. ‘대동강 근처에 양조장을 새로 지어 문배술을 만들어라'는 거였다. 그런데, 북한에 양조장 짓겠다고 하면 우리 정부가 허가해 주겠는가? 우리 입장에서도 북한에 양조장을 짓는다는 건 여러가지 부담이 컸다. 그래서 무산됐다.

대동강은 석회석 암층, 남한 지하수는 화강암층으로 수질이 다르다. 북한에서 문배술을 만들었을 때는 석회석 암층수를 사용했지만, 현재는 화강암 암층수를 부득이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물 성분을 일부 개조해서 사용한다. 그런데, 남한에서도 지금 양조장이 있는 김포 물이 매우 좋다.

마오타이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들은 대부분 석회석 암층수를 쓰고 있다. 하지만 석회석 암층수를 쓰면, 왜 술이 맛있는지 과학적으로 근거를 대기는 어렵다."

-문배술 역사는 1000년이 넘는다. 하지만, 화요를 비롯한 신생 양조장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전통 보존과 산업화 두마리 토끼를 다 잡긴 어렵다고 보나? 이중 더 중요한 것은?

(이기춘 대표)"문배술은 나라가 지정한 문화재이기 때문에 전수 보전이 우선이다. 회사 매출을 키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100억, 200억 하는 회사 부럽지 않다. 산업화는 아들인 이승용 실장이 맡아할 것이다."

-아들인 이승용 실장이 전반적인 회사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잘하고 있다고 보나?

(이기춘 대표)"아들은 대학 들어갈 때부터 술 제조 관련 전공을 선택했다. 농화학을 전공했다. 전수 보전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손주(이승용)에게 ‘너는 대학에서 전통술과 현대술이 어떻게 다른지 공부를 해라'고 주문하셨다.

현재 잘하고 있다. 전수 보전을 잘 하고 있어 아쉬운 점도 없다. 매출 더 키우는것보다 전수 보전이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