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에서 화학물질 관련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60대 사장 A씨는 요즘 "만학도가 됐다"고 토로한다. A씨는 "법 개정과 관련한 공문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면서 "비용 걱정은 둘째치고 혹시나 놓치고 있다가 얻어맞는 게 있을까 싶어 아들의 도움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법을 들여다보고 있다. 여기에 최근엔 (화학단지의 잇따른 인명사고로) 근로 감독이 나올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이참에 아예 사업을 접을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 52시간제 도입 등 연달아 펀치를 맞으면서 사장들끼리는 ‘이 나라는 정말 사업가를 괴롭히고 싶어 안달났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느냐고 하면 질색할 정도로 이미 이 산업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부가 진정으로 경제를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고 읍소했다.

2일 재계에 따르면 주52시간제 시행을 비롯해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중대재해법) 등 크고 작은 규제 법안들이 잇달아 예고되면서 이에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이는 제조업 분야의 중소 ·중견 기업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경영난에 처한 이들 기업은 "규제에 따른 비용 부담에 이제는 형사처벌까지 걱정해야 하는 셈"이라고 입을 모은다.

여수화학단지 전경.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30일 "중소기업도 예정대로 내년부터 주 52시간제를 적용한다"고 밝혔다. 약 한 달 뒤 바로 시행되는 주 52시간제를 지키지 못하는 중소기업 사업주는 2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 500곳 중 39%가 아직 주 52시간제를 시행할 준비가 안 된 것으로 나타났다. 계도기간 연장이 필요한 곳은 56%에 달한다고 밝혔다.

제조 분야의 중소·중견기업은 이외에도 난관이 산적해 있다. 최근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미등록 화학물질을 제조하거나 수입한 사람은 물론 사용·판매한 사람까지 처벌하는 내용의 화평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지난 2013년 도입된 화평법은 기업이 연간 1톤(t) 이상 제조·수입·판매하는 화학물질은 용도와 특성, 유해성에 관한 자료를 첨부해 정부에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를 어길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업계는 법안이 통과될 경우 비용 부담 때문에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화평법 개정안에 따라 화학물질 사용이 많은 염료·안료 등 중소기업의 등록 비용은 내년까지 최대 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염색 원료에 쓰이는 화학물질 한 가지 종류를 분류하고 등록하는 데만 2억원 가까이의 비용이 발생한다"면서 "취급하는 물질이 많으면 최대 수천억원까지 추가 비용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10월부턴 강화된 화관법 현장 검사가 시작됐다. 유해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기업이 내진설계·경보장치 등 413개에 달하는 시설 기준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이를 맞추려면 통상 공장을 전면 개조해야 하는데, 이에 따른 수억원의 비용 때문에 대다수 기업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다. 화관법을 어기면 대표이사는 최고 5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을 맞는다.

화관법을 적용받는 기업은 1만4000여 곳에 달한다. 화평법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반도체·의류 등 산업 전반에 들어가는 ‘뿌리 기술’인 도금과 염료·안료업종 중소기업들이 타격을 받는다. 도금업체 모임인 한국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이 최근 325개 회원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6%(310여개)가 현행 화관법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도금업계 관계자는 "화평법·화관법 등 환경규제로 인해 매해 약 40개 점검과 검사를 받는데, 검사 수수료만 해도 업체당 일 년에 400만원 가까이 든다"면서 "정부의 환경보호와 안전장치 강화 취지는 공감하지만, 지금의 규제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했다.

이에 지난달 27일 대한화학회와 한국화학공학회, 한국고분자학회, 한국공업화학회, 한국화학관련학회연합회 등 5개 화학단체는 "과도한 화학물질 규제가 화학·소재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 안전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화관법과 화평법 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국내 화학 분야 전문가 2만4000여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근로자가 숨지거나 다수의 피해자를 낸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와 법인의 처벌을 크게 강화한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안(중대재해법)’도 본래 목표인 재해 예방보다 경영 피해만 가중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조선DB

전문가들은 강화된 규제로 인해 전문 인력이 없거나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는 중소·중견 기업들이 특히 더 직격탄을 맞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서승원 중기중앙회 상근부회장은 "중소기업은 화평법, 화관법 등 환경법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인력이 없을뿐더러 법 자체가 워낙 많고, 세부내용이 고시로 복잡하게 구성돼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며 지난 9월 환경 규제 완화를 환경부에 요청한 바 있다.

정부가 1년에 약 1000개씩 기업 규제를 쏟아내면서 규제 신설과 강화로 발생하는 기업 비용을 상쇄해주려 도입한 규제비용관리제도도 유명무실해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2016년 7월부터 시행된 규제비용관리제 운영현황을 분석한 결과 신설강화 규제의 8.2%에만 제도가 적용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올해 기업 파산은 지난 2013년 이래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 9월까지 전국 법원 파산부에 접수된 법인파산 신청은 총 815건에 달한다. 법인파산 신청 증가 폭 역시 올해 전년 대비 17.9% 증가하면서 최대폭으로 나타났다.

추광호 한경연 경제정책실장은 "기업들이 코로나19로 생존을 담보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중소기업의 경영난이 가중될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는 제도 보완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