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권에서 CJ대한통운(000120)대리점을 운영하는 A씨는 최근 고민이 깊어졌다. 택배기사의 잇단 죽음으로 과로사 문제가 불거진 상황에서 본사가 대책이라면서 '택배분류 지원 인력'을 추가 고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A씨는 과로사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분류지원 인력이 근본적인 해결책인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또 인건비를 어떻게 부담할지에 대해서도 걱정이 생겼다.
A씨는 "대리점주들의 소통 창구인 네이버 밴드에서 '대리점주연합회가 왜 추가 고용에 합의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주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면서 "다른 대리점은 모르겠는데, 우리 대리점만 놓고 보면 분류작업대 구조상 분류인력을 따로 두는 것이 기사들의 업무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대리점주 B씨도 "코로나 사태로 택배업계가 호황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대리점마다 사정이 다 다르고 비용을 생각하면 이익이 크게 늘어난 것도 아니다"라며 "택배기사들과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는 것으로 서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택배기사 과로사 논란'과 관련해 택배사들이 분류인력 추가 고용, 심야 배송 금지 등 대책을 내놓은지 한달여가 지나고 있는 가운데, 정부와 본사의 대책안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 현장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가장 큰 쟁점은 '돈'이다. 일부 대리점은 과로 방지를 위해 추가 인력을 고용할 비용 문제를 걱정하고, 택배기사 가운데서도 소득 감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CJ대한통운과 한진(002320)택배, 롯데택배(롯데글로벌로지스) 등은 무턱대고 택배단가를 인상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해당사자 사이의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CJ대한통운은 지난달 22일 업계에서 가장 먼저 종합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이어 한진택배와 롯데택배도 대책을 내놓았다. 공통적으로 택배기사의 과로원인으로 지목된 분류 작업 관련 추가 인력을 고용하겠다고 했다. CJ대한통운은 기존 1000명에 3000명을 더 투입하고, 한진택배와 롯데택배도 1000명씩을 추가로 채용하기로 했다.
택배업계에 따르면 한진택배는 지난 1일부터 분류지원 인력을 추가 투입하고 있다. 연간 120억원 정도의 인건비가 추가로 들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용은 회사가 모두 부담하기로 했다. 다만 제시했던 1000명이 모두 현장에 배치된 것은 아니다. 한진 관계자는 "현장 상황이 다 달라서 현재 필요한 곳부터 순차적으로 분류지원 인력을 배치하고 있다"며 "내년 초쯤 배치가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CJ대한통운은 택배기사들의 작업강도를 낮추기 위해 분류지원 인력 4000명을 내년 1분기까지 투입할 예정이다. 연간 약 500억원의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돼 CJ대한통운과 개별 대리점이 비용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협의하고 있다.
하지만 대리점마다 택배기사 인원수와 계약관계, 작업방식 등 상황이 너무 달라서 논의가 길어지고 있다. 일부 대리점은 사업장 규모가 크지 않아 굳이 분류지원 인력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시기별로 택배물량의 변동이 있는데 한번 채용한 뒤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결국 큰 틀에서 각 대리점의 경영상황을 등급으로 분류해 본사가 분류지원 인력이 담당한 택배건수 당 일부를 지원하는 것만 정해졌다.
CJ대한통운 측은 "각 대리점마다 상황이 달라서 개별 협상을 해나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김종철 CJ대한통운 대리점연합회 회장 역시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의견부터 수렴하고 있다"며 "다 각자 사업자인데 무조건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택배기사들이 잇달아 숨지면서 '과로사 논란'이 불거진 뒤 회사들이 대책부터 발표한 것을 꼬집는 대리점주들도 있다. 국정감사 기간에 논란이 될 것 같으니 우선 대책부터 내놓고, 비용 문제를 대리점주에게 전가하려는 것 아니냐는 취지다. 한 대리점주는 "한참 이야기해야 할 사안인데 정부 눈치를 본 것인지 덜컥 발표부터 해버렸다"면서 "분류 인력 추가 고용이나 택배기사들의 산재보험 가입 등을 부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택배기사 과로의 근본 원인인 장시간·야간 근무를 놓고도 택배기사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한진택배와 롯데택배는 오후 10시 이후 심야배송을 중단했다. 정부는 지난 12일 택배기사 과로 방지대책의 일환으로 주간 택배기사의 심야 배송을 제한할 것을 권고하고, 토요일 휴무제 도입을 유도하겠다고 발표했다.
택배기사들은 업무량이 아닌 시간을 제한하면 더 바빠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무엇보다 배송 건수당 수입이 결정되는 구조는 그대로여서 결국 수입이 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서울에서 일하는 택배기사 B씨는 "무리하게 근무하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것에는 공감한다"면서도 "한편에서는 일괄적으로 근무를 못하게 하면 사실상 부업을 해야 하는 문제도 나올 수 있어 현장 상황을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장관이 페이스북을 통해 과로방지 대책을 알리는 글에 현직 택배기사가 댓글을 달기도 했다. 그는 "대부분 어려운 시절을 벗어나는 탈출구로 선택한 택배(기사)라는 직업이라 근무조건만 좋아지고 수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발표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것 같다"며 "시대도 변했고, 노동자가 존중받아야 하기에, 더 이상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아야 하기에 해야만 하는 당연한 조치들이 정작 현직(입장)에서는 덜컥 겁이 난다"고 썼다.
산재보험 가입 확대 문제도 마찬가지다. 정부와 업체들은 택배기사의 산재보험 가입을 확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의 산재보험료는 사업주가 모두 부담하지만, 택배기사와 같은 특수고용직은 산재보험료를 절반씩 내야 한다. 올해 기준 택배기사와 계약 당사자인 대리점주가 각각 월 2만3000원씩을 부담한다.
업계에선 부담해야 할 액수가 크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노동계는 일반 근로자처럼 전액 사업주가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지난 12일 성명을 통해 "산업재해로부터 특고(특수고용직)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속성 폐지를 전제 조건으로 산재보험료의 100% 사업주 부담 등 특고노동자를 위한 산재보험 제도를 마련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