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불원정대 '천옥'도 입었다… 비건 열풍에 뜬 인조 가죽
동물 복지·친환경 관심에… 파인애플·선인장 가죽도 등장

파인애플 가죽으로 만든 H&M의 재킷과 치마.

‘센 언니’ 열풍을 이끈 그룹 ‘환불원정대’의 리더 이효리.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부캐(부캐릭터) ‘천옥’을 연기하기 위해 다양한 가죽옷을 입고 방송에 출연했다. 잘 알려졌듯 제주에 사는 본캐(본캐릭터) 이효리는 채식주의자이자 동물 애호가로 유명하다. 부캐에 심취한 나머지 본캐를 잊은 걸까? 아니, 천옥의 가죽옷은 모두 비건 가죽(vegan leather)으로 제작됐다.

비건 가죽이란 동물의 사체를 사용하지 않은 가죽을 일컫는다. 흔히 ‘레자’라고 불리는 인조 가죽(artificial leather)도 여기에 속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조 가죽은 싸구려 취급을 받았지만, 최근에는 윤리적이고 편리한 의류 소재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에코(eco)·페이크(fake) 가죽이라 불리기도 한다.

◇ 진짜 같은 인조가죽, 윤리적이고 다양한 표현 가능해
인조 가죽은 동물 가죽보다 관리가 편하고 가격이 저렴하다. 예전엔 비닐 장판 재질에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요즘엔 품질이 좋아져 '가짜 티'도 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가죽보다 다채로운 색상 표현이 가능하고, 재단이나 봉제가 수월해 다양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인조 가죽을 입으면 진짜 가죽을 입을 때 느끼는 죄책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패션 업계에 따르면 매년 10억 마리가 넘는 동물이 가죽 채취를 위해 도살된다. 가죽을 피혁(皮革)으로 가공하는 무두질에 사용되는 각종 화학 물질로 인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다.

환불원정대 리더 천옥(이효리)이 입은 채뉴욕의 인조 가죽 재킷.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스텔라 매카트니는 동물성 피혁과 털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인조 가죽 재킷 한 벌 가격이 100만원이 넘지만, 동물 복지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판매가 이뤄진다. 닥터마틴은 비건 가죽으로 만든 워커를 판매하는데, 지난해 매출이 2017년과 비교해 279% 증가했다. 패스트 패션 브랜드 자라와 H&M도 ‘에코 가죽’이라는 이름으로 인조 가죽 상품 카테고리를 운영한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여성복 보브가 지난 8월 출시한 ‘에코 레더 컬렉션’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현재 전체 제품 중 절반 이상이 70%가 넘는 판매율을 보인다. 최하나 보브 마케팅 담당자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1980~2003년생)를 중심으로 윤리적인 소비를 즐기는 추세를 고려해 올해 처음 에코 가죽 상품군을 내놨다"며 "진짜 가죽 못지않은 질감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 가죽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인조 가죽으로 사용되는 폴리우레탄(PU)과 폴리염화비닐(PVC)의 원료는 플라스틱으로, 완전분해까지 수백 년이 걸린다. 이 때문에 환경론자들은 ‘에코’라는 이름으로 빠르게 번지는 인조 가죽 패션의 유행을 우려한다.

일각에선 동물성 가죽을 쓰되, 도축과 가공 방법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패션 트렌드에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식용산업에서 채취한 동물 가죽을 식물성 타닌으로 무두질한 베지터블(vegetable·채소) 가죽이 대표적이다. 영국 가죽 제품 브랜드 멀버리는 최근 출시한 알렉사 핸드백을 친환경 무두질로 만든 가죽을 사용해 탄소 중립 공장에서 제작했다.

친환경 브랜드를 표방하는 나누슈카(왼쪽)와 스텔라 매카트니의 인조 가죽 제품.

◇ 파인애플·선인장으로 만든 대안 가죽
채식 인구 증가와 윤리적 소비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비건 가죽 시장의 성장은 가속화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그랜드 뷰 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비건 시장 규모는 2018년 이후 연평균 9.6%씩 성장해 2025년 약 29조717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업체는 인조 가죽 시장도 매년 4.4%씩 성장해 2027년에는 45조5421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에는 파인애플 잎, 포도 껍질, 사과 껍질, 선인장, 망고, 버섯 등 식물성 원료로 만든 가죽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파인애플 부산물로 만든 ‘피냐텍스(pinatex)’는 파인애플 잎에서 섬유질을 추출해 고무 성분을 제거한 뒤 숙성 시켜 만든다. 섬유질을 모아 펠트(felt·양모 등을 압축해 원단으로 만드는 것)처럼 찍어내고 무두질하면 동물 가죽과 비슷하게 단단해지는데, 기존 가죽보다 가볍고 부드럽고 통기성이 뛰어나다. H&M, 푸마, 휴고 보스 등이 피냐텍스로 재킷과 신발 등을 만들었고, 테슬라는 자동차 시트 가죽으로 사용했다.

스튜다오톰보이의 한지 가죽 제품.

앤아더스토리즈는 와인 제작 후 남은 포도 껍질로 제작한 가죽 ‘비제아(vegea)’로 만든 샌들을, 타미힐피거는 사과 껍질 가죽으로 만든 ‘애플스킨 스니커즈’를 출시했다. 비건 패션 브랜드 낫아워스는 멕시코에서 개발한 선인장 가죽 ‘데세르토(desserto)’로 카드 홀더를 선보였다. 지난 8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 소개된 이 제품은 목표액의 427%를 초과 달성했다. 데세르토는 프랑스 명품 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주최한 ‘2020 이노베이션 어워드’의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국내 원단 회사 한원물산이 선보인 한지 가죽 ‘하운지’도 대안 가죽으로 주목받는다. 닥나무 인피로 만든 한지와 자연 섬유인 면을 접목해 개발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의 여성복 스튜디오톰보이가 하운지로 만든 재킷과 셔츠, 바지 등을 출시했다.

알고 보면 한지 가죽은 고려 시대에도 쓰였다. 송나라의 손목이 쓴 기행문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고려인이 닥종이를 여러 겹 붙인 의혁지(擬革紙)를 가죽 대신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옻칠이나 콩댐을 해 단단해진 의혁지는 갑옷이나 화약통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타미힐피거의 사과 껍질 가죽 스니커즈(왼쪽)와 낫아워스의 선인장 가죽 카드 홀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