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화석연료를 원료로 제품을 만들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정유업계와 화학업계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고부가가치합성수지(ABS), 합성고무(SBR), 폴리염화비닐(PVC) 등 화학 제품 수요가 급증하면서 화학 업체들은 추석 연휴에도 공장을 최대치로 가동하고 있지만, 상반기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정유사들은 하반기에도 실적 부진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달 중순부터 상장사들의 3분기 실적 발표가 예정된 가운데 증권업계는 SK이노베이션(096770), GS칼텍스, S-Oil(010950), 현대오일뱅크 등 4개 정유사가 3분기 흑자 전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흑자 폭은 수백억원에 그쳐 실적 개선 폭이 미미할 것으로 봤다. 이들 4개 정유사는 올해 상반기 총 5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각국에서 코로나 재확산이 이어지면서 인구 이동과 물동량이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며 "휘발유는 물론 항공유, 선박 연료 소비가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해 정유사들이 이익을 내기 어려운 환경"이라고 말했다. 국제 유가가 큰 폭 하락하면서 원료비 부담이 줄었지만 수요가 늘어나지 않아 정유사의 수익을 좌우하는 정제마진은 배럴당 0~1달러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손지우 SK증권 애널리스트는 "탈(脫) 석유시대와 공급증대라는 중장기적인 부담과 함께 코로나19에 따른 수요 약세가 맞물려 정유업체는 단기간 내 실적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화학 업체는 예상치 못했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코로나가 확산한 초기에는 전 세계 경제 활동이 사실상 멈추다시피 해 화학 업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이후로는 경제 활동이 일부라도 재개되면서 ABS, SBR, PVC 등 화학 소재 수요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과 유럽 화학 공장이 코로나 확산과 허리케인 등의 영향으로 가동을 멈추면서 공급 능력이 떨어진 상태라 국내 화학 업체들은 추석 연휴에도 공장 가동률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최근 가장 큰 호황을 누리는 화학 제품은 ABS다. 플라스틱 원료인 ABS는 TV,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과 자동차 소재로 많이 쓰이는데, 코로나 사태로 가전 판매가 늘어나면서 ABS 가격이 껑충 뛰었다.
창호, 바닥재 등 인테리어 제품의 주된 소재인 PVC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은 물론 미국, 유럽 등 전 세계 건설 수요가 회복되는 가운데 코로나를 피하기 위해 외부 활동을 줄이는 대신 내부 인테리어에 투자하는 사람도 늘어난 덕분이다. 자동차 수요가 회복되면서 급락했던 SBR 수요도 회복되고 있다. 마스크 필터 재료인 폴리프로필렌(PP)과 일회용 장갑 원료인 NB라텍스 등 화학제품 수요도 화학 업체의 이익을 끌어올리고 있다.
증권사들은 LG화학(051910)과 한화솔루션, 금호석유화학(011780)등 국내 화학사의 3분기 실적 호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윤재성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현재 화학 업황의 가장 큰 특징은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전방업체의 수요가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라며 "수요 호조를 반영해 전반적인 제품가격 상승과 마진 확대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