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준칙, 추석 연휴 앞둔 이달 말 발표 예정
홍남기 "예외조항 등 유연성 보강할 것"

문재인 정부 출범 후 4년 동안 국가채무가 180조원 가까이 폭증하는 등 재정건전성 악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이달 중 발표할 재정준칙을 최대한 유연한 방향으로 만들겠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 대규모 재해, 급격한 경기침체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해는 재정준칙을 적용하지 않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재정수입, 재정지출, 재정수지, 국가채무 등 총량적 재정지표에 대한 제약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재정준칙을 최대한 느슨하게 만들겠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 문재인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방만한 재정지출을 통제할 수 있는 구속력이 없다면 재정준칙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정준칙이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무용지물이 된 국가재정운용계획과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유연한 재정준칙, '3~5년' 중장기 지출 증가율 기준 삼을 듯

21일 정부와 국회 등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이달 말쯤 재정준칙을 발표하기 위해 마무리 논의를 진행 중이다. 추석 연휴를 앞둔 29일 국무회의를 통해 확정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일반적으로 재정준칙은 정부의 방만한 재정지출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렇지만, 정부는 '유연한 재정준칙'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확장적 재정정책을 정당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왼쪽부터 안도걸 기재부 예산실장, 홍남기 경제부총리, 안일환 기재부 2차관 등 재정당국 최고위 관계자들이 추경 예산안 브리핑에 앞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부는 국가재정운용계획 방식의 재정준칙을 만들 계획이다. 5년 주기 중장기 관점에서 재정운용계획을 작성하는 것처럼 재정준칙도 단년도 지출 증가율이 아니라 3~5년 간 평균치 기준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에 따라 이달 말 발표되는 재정준칙은 3~5년간 평균 지출 증가율을 같은 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실질 성장률과 물가 상승률 합) 범위에서 관리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중장기 평균 지출증가율을 평균 성장률에 비해 1~2%P를 넘지 않는 수준으로 관리하겠다는 목표가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처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 대규모 자연·사회재난 등이 발생해서 성장률이 급락한 경우는 재정준칙 적용을 제외하는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규모 재해'와 '경기침체·대량실업의 발생 또는 발생우려'로 규정된 국가재정법상 추가경정예산편성 요건 등이 재정준칙 적용 예외 조건으로 옮겨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렇게 되면 추경을 편성하는 해는 재정준칙 적용대상에서 제외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경기호전으로 세수(稅收)가 늘어나 정부 수입이 명목 성장률을 초과할 경우에도 성장률을 초과하는 지출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재정준칙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달 초 정부가 발표한 '2020~2024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예를 들 경우, 코로나 사태가 일어난 올해는 재정준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2021년 총지출 증가율이 8.5%에 이르지만, 2024년 4.0%까지 점차적으로 낮아져, 4년 간 평균 증가율은 5.6% 수준이다. 이는 2021~2024년 평균 명목성장률 전망치 4.2%에 1.4%P 가량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재정준칙에 부합한다는 논리다.

◇ 독일·EU·미국은 엄격한 재정준칙 운용

이같은 방향은 재정규율에 대해 역대 정부가 취했던 태도와 크게 상반된다. 지난 2016년 정부 입법으로 제출됐지만,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아 20대 국회에서 폐기된 재정건전화법 제정안에서는 관리재정수지 적자비율을 3%, 국가채무는 GDP 대비 45%로 관리하도록 규정했었다. 이같은 경직적인 재정준칙은 코로나19 사태 등 대규모 재정투입이 필수적인 시기에 정부 대응을 옥죌 수 있다는 게 현재 기재부 당국자들의 판단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이달초 내년도 예산안 발표 때 "이번 코로나 위기처럼 극단적인 위기로 재정이 반드시 역할을 해야 할 상황에는 예외를 인정하는 등 유연성을 보강해 재정준칙을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중장기 관점에서 유연한 재정준칙을 만들겠다는 정부 구상은 재정준칙을 운용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다. 국회예산정책처(예정처) 보고서에 따르면, 재정준칙을 운용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연(年) 단위로 지출 통제 장치를 두거나, 국가채무 유지 목표의 절대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독일은 헌법에서 부채의 신규발행을 GDP대비 0.35% 이하로 규정하고 있고, 미국은 재정소요 입법시 다른 의무 지출 감소나 세입 증가 방안을 동시에 제시해야 하는 페이고(Pay-go) 원칙을 갖고 있다. 유럽연합(EU)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일반정부 적자를 GDP 3% 이내, 일반정부 채무비율을 GDP 60%이내로 못박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연한 재정준칙'이 국가재정을 중장기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취지와 달리 매년 그 내용이 큰 폭으로 수정되는 국가재정운용과 비슷한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한 민간 경제연구원 고위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5년 단위 국가재정운용계획이 매년 대폭 수정을 거듭하는 게 정부 재정정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면서 "재정준칙이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인 식으로 만들어지면 정부 정책의 신뢰도는 더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