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 '완전고용' 강조에 "물가-실업률 연결고리 전과 달라"
한은도 고용 우려 크지만 '고용안정' 목표제시 가능성은 희박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필립스 곡선'에 이별을 선언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평균물가목표제(AIT) 도입을 시사하면서 통화정책의 무게추를 물가에서 고용으로 옮겨가면서다. '필립스 곡선'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역관계를 설명한 고전적 경제이론으로, 그간 통화정책의 주요 원칙으로 작동해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물가가 장기화되면서 유효성 논란에 시달려왔던 '필립스 곡선'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그 신뢰성을 완전히 잃은 분위기다. 그동안 물가와 고용을 포함한 실물경제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지만, 코로나19 이후 고용은 물가가 오르더라도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한국은행도 코로나19 이후 고용시장 동향 분석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금융통화위원이 고용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언급하는가 하면 경제연구원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실업자 중 상당수가 영구적으로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다만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양대 목표로 두고 있는 만큼 고용이 실물 경기를 판단하는 지표 이상의 의미를 갖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은은 고용안정을 통화정책 운용목표로 삼으라는 정치권의 요구에는 선을 긋고 있다.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

◇연준의 정책 변화 "코로나 이후엔 물가보다 고용"

연준은 지난 16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마친 뒤 완전고용 수준으로 실업률이 떨어지고, 물가가 기존 목표치(2%)를 일정 기간 완만하게 초과할 때까지 현행 금리를 유지한다는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지침)’를 제시했다.

이에 연준의 양대 통화정책 목표인 물가안정과 완전고용 중 그간 물가에 찍혀 있던 방점이 고용으로 옮겨갔다는 해석이 이어졌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도 금리동결 결정 후 기자회견에서 "최대고용 등의 성과를 달성할 때까지 경기부양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시장에서는 연준이 평균물가목표제 도입을 시사한 데 이어 포워드 가이던스에 변화를 준 것을 두고 '필립스 곡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왔다. 1958년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필립스(Phillips, A. W.)가 발표한 이 이론은 실업률이 낮아지는 경기호황이 오면 자연히 임금이 오르고 물가가 올라간다는 내용이다. 연준이 시사한 변화에는 코로나19 이후에는 경기가 회복되고 물가가 상승하더라도 실업률은 낮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기저에 있다. 론 인사나 CNBC 선임 분석가는 "연준이 필립스 곡선을 포기했다"고 언급했다.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실업률 개선에도 저물가가 지속되면서 필립스 곡선이 오작동 하고 있다는 우려는 꾸준히 나왔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여기에 더해 고용 회복이 더뎌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실업률과 물가의 상관관계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것이다. 그동안에는 2%의 물가상승률 목표만 도달하면 실물경기도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동안 중앙은행의 2% 인플레이션 목표제가 성립한 배경에는 필립스 곡선이 있었다"며 "연준이 물가와 별개로 실업에 더 중점을 두게 된 데는 기존의 원칙에서 벗어나야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한은 본관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은, '고용안정' 목표 명시에 여전히 신중한 입장

한은 또한 코로나19 이후 노동시장의 회복이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지난달 금리동결을 결정했던 통화정책방향 회의에서도 고용회복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 한 금통위원은 "최근 서비스업 등에서 자동주문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의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며 "이러한 구조적 변화로 고용의 경직성(rigidity)이 높아져 향후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고용 회복이 제약될 소지가 있다"고 했다.

한은 경제연구원에서는 코로나19 사태로 고용시장에 영구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연구원은 지난 7일 발간한 '코로나19의 노동시장 관련 3대 이슈와 대응방안'에서 전세계 노동시장의 3대 이슈로 실업의 급증, 재택근무의 확대, 자동화 촉진 등을 지목하고, 코로나19로 인한 실직자 중 31~56%는 영구적 실업자로 남을 것이라는 해외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다만 고용안정이 한은의 통화정책 목표로 명시되는 등의 적극적인 변화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17~2018년 국회에서는 잇따라 한은 목표에 고용안정을 추가하는 내용의 한은법 개정안이 발의되자 이주열 총재는 "검토는 하지만 여전히 고용을 설립목적에 두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조심스럽다"고 했는데, 지금도 이 입장을 고수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물가안정에 이어 2011년 금융안정을 한은법에 추가한 한은이 고용안정까지 주 목표로 고려한다면 상충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고성장에서 저상장으로 전환되는 국면에서 저출산·고령화로 인구구조가 변하고 있어 연준과 통화정책 환경이 다르다는 점도 고용을 최우선으로 삼기 어려운 배경이다. 만약 미국처럼 고용이 살아날때까지 저금리를 유지했다가는 자산 시장이 과열되는 부작용만 낳을 수도 있다. 비기축통화국에서 자산시장의 거품은 더욱 경계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외국계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은 100년 가까이 경제 사이클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라 한국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며 "한은이 현 수준 이상으로 아주 적극적으로 고용을 목표로 내세우거나 하는 일은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