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자가 갑자기 튀어 나올까 불안해 속도를 못 낸다."

최근 회사원 김모(39)씨는 퇴근 후 귀가 중 밤길 운전을 하면서 차량 속도를 시속 60km를 넘기지 않으려고 각별히 신경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나 어린이 또는 노인 보호구역을 지날 때면 더욱 긴장한다고 했다. 최근 유명 연예인 임슬옹씨가 무단횡단을 하던 보행자를 차로 치어 사망하게 했다는 뉴스를 접한 뒤 긴장감이 더욱 늘었다.

김씨는 "비가 내릴 때나 밤에는 무단횡단 보행자가 시야에 안 들어올 때도 많아 불안하다"며 "속도 규정이라도 지켜야 사고가 나도 형사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해서 일부러 사람이 다니는 길 주변에서는 스스로 ‘거북이 주행’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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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횡단 보행자에 대한 운전자들의 불안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갑자기 뛰어든 보행자 과실로 사고가 나더라도 운전자의 작은 실수가 하나라도 있을 경우 형사상 책임을 져야하는 불리한 위치에 있어서다.

12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무단횡단으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자는 456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보행 중 일어난 교통사고 전체 사망자 1302명 중 35%가 무단횡단으로 사고를 당한 것이다.

무단횡단으로 인한 교통사고 책임은 원칙적으로 보행자에게 있지만, 운전자 부주의가 조금이라도 입증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운전자에게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이 적용돼 사람이 죽거나 다친 경우 업무상 과실 또는 중과실 치사상의 범죄가 성립힌다. 이 경우 최대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보통 운전자의 과실 입증은 형사처벌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사고 당시 주변 정황 등을 토대로 운전자의 과실을 추정한다. 운전자의 운행 속도가 속도 규정을 준수했는지 여부, 당시 도로 상태와 피해자가 입은 의상 색상, 운전자의 과거 사고 이력 등을 참고해 판단한다.

특히 규정속도 준수 여부는 수사기관이 가장 중요하게 살피는 정황 중 하나다. 통상적으로 무단횡단을 시도하던 보행자가 갑자기 뛰어들어 이를 보지 못한 운전자가 실수로 사고를 냈더라도 운전자가 속도 규정을 어겼을 경우에는 형사처벌을 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운전자들은 혹여나 속도 규정을 위반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운전대를 잡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지난 3월 25일 '민식이법'(개정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운전자들의 불안감이 더 커졌다는 하소연이 많다. 회사원 박모씨는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는 혹시나 속도를 위반할까 노이로제가 생길 지경"이라며 "불쑥 어린이가 무단횡단을 시도하다 차에 부딪힐까 걱정이 돼 조마조마 하다"고 했다.

민식이법 시행으로 어린이가 보호구역에서 무단횡단 중 차에 부딪혀 죽거나 다칠 경우에도 운전자들이 가중 처벌을 받게 된다. 형량도 최대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다. 다른 일반지역에서 사고 발생시 최대 5년 이하 금고형에 처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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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자들은 "보행자의 갑작스런 무단횡단으로 불의의 사고가 일어난 책임을 운전자에게만 과도하게 돌리는 것 아니냐"면서 답답함을 호소한다. 무단횡단 보행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해 사고를 예방하기 보다는 사고 주의 책임을 운전자에게만 과도하게 돌렸다는 것이다.

현행법령(도로교통법) 규정상 무단횡단시 처벌은 벌금(20만원 이하)이나 과태료 처분에 그치고 있다. 무단횡단시 보행자 대부분이 과태료 처분을 받는데 그 금액도 2~3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경찰 한 관계자는 "아무리 운전자 측이 피해자가 갑자기 뛰어들어 보지 못했다고 주장해도 규정 속도를 위반한 정황이 있다면 무거운 형벌을 피하기 어렵다"며 "피해자의 과실이 크더라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