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춘추관 브리핑실에 들어온 것은 지난 20일 오후 4시였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의 하루 전 발언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문 대통령은 주 원내대표 발언에 대해 "매우 부적절한 발언" "아무리 야당이라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했다. 주 원내대표의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는 적과 내통하는 사람' 발언이 나온 지 28시간 뒤였다.

문 대통령이 논란이 된 문제에 이렇게 빨리 대처할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그간 많은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사안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기를 꺼려왔기 때문이다. 또 입장을 밝히더라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윤미향 논란'에 문 대통령이 입을 연 것은 6월 8일이다. '윤미향'이라는 민주당 의원 이름 언급 없이 "지금의 논란과 시련이 위안부 운동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정의연 등 관련 단체를 작심 비판한 5월 7일로부터 32일째 되던 날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용수 할머니를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국빈만찬에 초대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소개한 인연이 있는데도 그랬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자 지난 9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청와대는 박 전 시장을 고소한 전 비서 A씨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부르며 '2차 가해' 논란의 대상이 됐다. CNN이 박 전 시장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을 묶어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문 대통령이 동료들의 성범죄에는 침묵한다"고 쓴 게 지난 16일이다.

그러나 저러나, 문 대통령은 박 전 시장이 세상을 뒤로 한 지 2주째 어떠한 입장 표명도 않고 있다. 강민석 대변인은 언론 통화에서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해놓고서는 청와대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을 한 게 있냐고 묻자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진상 규명 결과가 나와야 될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강 대변인의 발언도 "피해자가 2차 가해 등 고통을 받고 있는 부분에 대한 말"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어떤 생각에서 입장 표명을 않는지는 2년 7개월간 국무총리를 지낸 이낙연 의원이 대신 말했다. "때로는 말씀을 않는 것도 반응일 수 있다."

이 의원의 말처럼, 때로는 침묵이 백마디 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백인 경찰의 무릎에 눌려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추도식이 열린 6월 5일, 미국 전역에선 8분46초간 침묵으로 추모했다. 8분46초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이 무릎으로 플로이드의 목을 짓누른 시간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무반응은 항거의 의미를 담은 침묵과 다르다. 대통령은 거악(巨惡)에 맞서 싸우는 다윗이 아니며, 국민들은 찬반이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에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기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은 침묵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묵비(默秘)에 가깝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라는 미란다 원칙에 나오는 그 '묵비'다. 불리한 사안에 입을 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행동이다. 실제로 입장을 발표하더라도 대통령에게 불리할 것이 없었던 주호영 원내대표의 발언에는 하루 만에 반응했다.

문 대통령은 당선 전 본인을 소개한 '59문 59답'에서 '대통령이 된 후에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광화문에서 국민과 막걸리 한 잔 하는 삶"이라고 답한 바 있다.

국민들과 막걸리 잔을 부딪히면서도 국민들이 하는 말에 아무 대답을 안 할 요량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국민들 사이에 갈등이 심각하고 극도로 민감한 현안에 아무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저 막걸리 잔만 마주칠 뿐 대답은 하지 않는 '묵비 대통령'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