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부터 이어진 숙명의 라이벌
국내 맥주 1위 기업 '오비→하이트→오비' 엎치락뒤치락
맥주의 계절 여름. 맥주시장 왕좌를 놓고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가 진검 승부를 펼치고 있다. 메가 브랜드 '카스'를 앞세워 국내 맥주 시장을 지배했던 오비맥주였지만, 하이트진로가 지난해 '테라'를 출시하면서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여전히 카스가 국내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지만, 점유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반면, 하이트진로는 메인 브랜드였던 '하이트'를 잠시 내려두고 '테라'에 주력하며 점유율을 끌어 올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닐슨코리아가 발표한 '2019년 국내 맥주 소매시장 통계 자료'에 따르면 오비맥주의 지난해 판매량은 4억1925만ℓ로 전년 대비 6.9% 줄었다. 같은 기간 하이트진로의 판매량은 2억6412만ℓ로 8%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테라의 인기가 지속되면서 두 기업간 판매량 격차가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3월 출시한 테라는 5월 말 기준 8억6000만병이 판매됐다. 1초에 22.7병(330ml 기준)이 판매된 셈이다. 출시 101일만에 1억병 판매를 기록한 테라는 여전히 상승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하이트진로에서는 "국내 맥주 시장의 판도를 변화시키고 있다" "1등 DNA를 되찾았다"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오비맥주는 하이트진로의 호언장담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하이트진로의 맥주 판매량이 빠르게 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1등 기업은 오비라는 것이다. 오비맥주 측은 테라가 맥주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킨 것은 맞지만, 2019년 4분기 기준 테라와 하이트의 판매량을 모두 합쳐도 '카스 프레시' 판매량의 절반에 그친다며 평가 절하한다.
◇ 87년 간 이어진 라이벌 관계…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하이트진로의 전신인 조선맥주는 1933년 8월 9일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에 사업장을 차렸다. 같은해 12월 조선맥주 바로 옆에 오비맥주의 전신인 '일본쇼와기린맥주'가 생겨났다. 당시 영등포는 전국에서 물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맥주보다 '삐루'라는 표현이 익숙했던 80여년 전부터 두 기업은 라이벌이 됐다. 일제 해방 후 쇼와기린맥주는 상호를 '동양맥주'로 바꾸고, 상표를 '오비맥주'로 변경했다.
이후 국내 맥주시장은 오비가 1등, 조선이 2등인 채로 쭉 이어졌다. 하지만 1993년 조선맥주에서 하이트를 출시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당시 오비맥주는 모기업인 두산그룹의 계열사였던 두산전자가 낙동강에 폐놀을 무단 방출하는 사건이 불거지면서 불매운동 대상이 됐다. 오비맥주가 '물을 더럽힌 기업'으로 몰리는 동안 조선맥주의 하이트는 '천연암반수, 깨끗한 물로 만들었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소비자들에게 어필했다. 효과는 강력했다. 하이트는 처음으로 오비를 제치고 업계 1위에 등극했다. 하이트의 대성공에 조선맥주는 하이트맥주로 사명을 바꿨다.
오비맥주도 하이트의 질주를 보고만 있진 않았다. 배우 박중훈의 '랄랄라' 댄스로 유명한 '오비라거'를 출시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1998년 IMF 사태 이후 유동성 위기를 겪은 두산그룹은 오비맥주의 지분 상당수를 벨기에의 주류 기업 인터브루에 넘겼다. 이후 오비맥주는 두산그룹과 인터브루의 합작회사 형태가 됐다. 2001년엔 두산그룹이 잔여 주식을 인터브루에 처분하면서 오비맥주는 인터브루의 자회사가 됐다.
인터브루의 자회사가 된 오비맥주는 '카스' 맥주를 주력 제품으로 내세웠다. 원래 카스는 1994년 진로와 미국 쿠어스사가 합작해 만든 '진로쿠어스'의 제품이었다. 오비맥주는 1999년 진로쿠어스를 인수한 뒤 카스 맥주의 품질을 업그레이드해 시장에 선보였다. '톡 쏘는 맛'을 내세운 카스는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었다. 2009년 글로벌 사모펀드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가 오비맥주를 인수한 뒤엔 마케팅도 강화했다. 2012년 오비맥주는 16년 만에 하이트를 제치고 맥주업계 1위 자리를 되찾았다.
이후 카스는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카스가 전 세대에 걸쳐 골고루 사랑을 받은 반면, 하이트는 브랜드 파워가 계속 밀렸다. 여기에 수입 맥주가 '4캔 1만원' 마케팅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을 급격히 늘려갔고, 롯데주류가 출시한 '클라우드'도 하이트의 점유율을 잠식했다. '하이트 엑스트라 콜드' 브랜드로 젊은층 사로잡기에 나섰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하이트진로는 맥주사업 부진 타개에 사활을 걸었고, 그렇게 신제품 '테라'가 출시됐다.
증권가에서는 현재 하이트진로 맥주의 시장점유율을 30%대 초중반으로 추정한다. 한때 20%대로 떨어졌지만 지난해부터 많이 회복했다는 분석이다. 오비맥주의 점유율은 40% 초중반으로 본다. 올 하반기 하이트진로의 맥주 시장점유율이 30% 후반대에서 40%를 넘어설 거란 예측도 나온다.
◇ 테라 성공 공식 살펴보니…'카스 공식 그대로네?'
테라 열풍은 2000년대 카스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카스가 젊은 이미지를 앞세워 1등 브랜드였던 하이트를 밀어냈던 것처럼, 테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앞세워 카스를 공략하고 있다. 카스가 '톡 쏘는 맛'으로 젊은 세대 고객을 확보했다면, 테라는 '100% 리얼탄산 공법'으로 라거 특유의 청량감을 강화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라거의 장점을 극대화해 가슴을 쓸어내릴 듯한 시원한 청량감으로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녹색을 앞세운 패키지 디자인도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녹색을 적용하고 제품의 특성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병과 라벨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전세계 맥주병 250여 개를 연구했다"며 "소비자 테스트 등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색상과 모양, 길이를 결정한 것도 주효했다"고 말했다.
테라의 시장 연착륙에 하이트진로는 6년 만의 맥주사업 흑자 전환을 기대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2014년 맥주사업이 225억 적자를 기록한 뒤, 이후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6년동안 누적된 맥주사업 적자만 1400억원이 넘는다. 테라를 출시한 지난해엔 공장 설비 투자와 마케팅 비용이 늘어 적자폭이 전년 대비 2배로 늘었다.
적자를 감내하고 뿌린 씨앗은 올해부터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올 1분기 맥주사업에서 89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투자업계는 하이트진로가 올 2분기에도 맥주사업에 7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한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도 흑자 전환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이 나온다. 코로나로 인해 매장 영업을 최소화하면서 판관비를 줄인 게 영업이익에 반영됐다는 것이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코로나로 회식 등이 사라져 전체 주류 판매량이 줄었다"면서도 "대신 홈술 문화가 확산되면서 영업 비용이 적게 드는 가정용 판매가 늘어 이익률이 개선됐다"고 말했다.
테라의 압박에 카스도 '젊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절치부심 중이다. 최근엔 '카스 프레시'에 저온 숙성을 강조하기 위해 '콜드 브루드'라는 표현을 넣고 라벨지와 병 디자인을 개선했다. 카스 고유의 푸른색 바탕에 더 커진 로고를 대각선으로 배치했다. 올 여름 캠페인 모델로 K-POP 아이돌 엑소 멤버로 유닛 활동을 하고 있는 세훈과 찬열을 발탁한 것도 브랜드 이미지를 젊게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동안 카스는 유명 셰프 고든 램지나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 등을 모델로 쓰며 '한국 맥주는 맛이 없다'는 편견을 깨는데 마케팅을 주력했다. 2017년 카스의 모델로 활동한 램지는 '치맥'(치킨+맥주) '삼맥'(삼겹살+맥주) '피맥'(피자+맥주) 문화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내며, 기름진 한국 음식과 어울리는 카스의 매력을 강조했다. '맥주 마니아'로 통하는 백 대표는 카스와 다양한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백 대표는 "아메리칸 라거 계열인 카스는 우리나라 음식과 최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최고의 품질을 갖춘 맥주"라고 평가했다.
◇두 회사의 아킬레스건은?
하이트진로는 그룹 경영권을 박문덕 회장의 장남 박태영 하이트진로 부사장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외부 회사를 부당지원한 혐의로 지난 2018년 공정위로부터 107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검찰은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맥주캔 제조·유통 과정에 박 부사장이 최대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를 거래 과정에 넣어 '통행세' 방식으로 일감을 몰아준 혐의로 박 부사장을 기소했다. 법원은 지난 5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12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선고했다. 최근엔 공정위로부터 총수 친적 소유 계열사를 9년간 제대로 공시하지 않고 숨긴 사실도 드러났다.
오비맥주의 아킬레스건은 노사 갈등이다. 오비맥주는 과거 두산그룹 소속일 때무터 강성 노조로 유명했다. 오비맥주 노동조합은 지난 6월 17일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이 해결점을 찾지 못하자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투표는 가결됐고, 언제라도 파업에 돌입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춘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오비맥주 노조는 매년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불안한 노사 관계는 향후 맥주 생산에도 파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 CEO 비교해보니…국적만 다를 뿐, 둘 다 정통 맥주人
하이트진로의 CEO를 맡고 있는 김인규 사장은 1989년 하이트진로에 입사해, 하이트진로에서만 30년을 근무한 '정통 하이트맨'이다. 하이트맥주 영업본부장과 부사장을 거쳐 2011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 어느새 CEO 경력만 10년차가 됐다.
박문덕 회장은 2013년 대표이사 지위를 반납한 뒤, 김 사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다. 부진한 맥주사업은 김 사장에게 애물단지였다. 하지만 발포주로 출시한 필라이트가 흥행에 성공한 데 이어 테라가 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업계에서는 김 사장의 경영 비법을 '꾸준한 노력'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김 사장은 지난해 10월 베트남 하노이대 강연에서 말콤 글래드웰이 역설한 '1만시간의 법칙'을 언급하며 "어떠한 분야라도 1만시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오비맥주의 CEO는 벨기에 출신 맥주 전문가 '벤 베르하르트(Ben Verhaert) 사장이다. 올해 1월 오비맥주 사장으로 부임한 그는 한국명으로 '배하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물 하(河), 높을 준(峻).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듯 바다처럼 무한한 가능성으로 이끄는 리더십'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한국 문화를 잘 이해하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파트너들에게 한층 더 친화적인 방법으로 소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배 사장은 2001년 AB인베브에 입사한 이래 벨기에 영업 임원, 룩셈부르크 사장, 남유럽 지역 총괄 사장 등을 지냈다.
배 사장은 맥주의 본고장인 벨기에 출신으로 맥주 자체에 대한 애정도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다. 오비맥주 관계자는 "배 사장이 진정성 있는 소통 경영으로 회사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끌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