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1월1일부터 외국인을 포함한 국내 전 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최저임금이 시급 기준 올해보다 1.5% 오른 8720원(월 182만2480원)으로 결정됐다.

이는 최저임금제도가 처음 도입된 지난 1988년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인한 경기 위축이 1990년후반 국제통화기금(IM) 시절 때나 2010년 국제 금융위기 당시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왼쪽)이 14일 새벽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열린 제9차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

최저임금은 결정됐지만, 노·사 모두에서 불만이 나온다. 노동계는 역대 최저 수준의 인상률이 결정된 것에 대해 "최저임금 제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경영계는 "동결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는 반응이다.

최저임금 인상률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최저임금 1만원’은 임기 내 달성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2022년 적용 최저임금을 1만원 수준으로 올리려면 현재보다 14% 이상 인상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최저임금 결정 과정을 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따라 최저임금은 임기 초기 2년간 급격하게 올랐다. 그러나 ‘최저임금 속도조절론’이 나온 뒤에는 오히려 2.87%, 1.5% 인상되며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특히 역대 최저치인 이번 1.5% 인상률을 두고 노동계에선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따지면 동결 또는 삭감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반응이다. 문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이 뒷걸음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 코로나 사태 속 경영계 최소 동결 주장이 더 ‘먹혔다’

올해 최저임금 심의는 시작부터 난관이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 사태로 경제 전반이 타격을 입은 가운데, 경영계는 ‘최소 동결’을 주장했다. 코로나로 인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최저임금이 더 오르면 인건비가 감당이 안되는다는 게 경영계 입장이었다.

올해 적용된 최저임금이 지난해 역대 세번째로 낮은 수준인 2.87% 인상(시급 8530원)으로 결정됐지만, 경영계는 2017년 16.4%, 2018년 10.9% 올라 3년 간 32.8%나 인상됐기 때문에 ‘삭감’ 요구도 서슴치 않았다.

더욱이 IMF는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2.1%로 예상, 코로나 사태에 따른 최저임금 삭감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노동계 역시 코로나 영향을 올해 최저임금의 변수로 꼽았다. 그러나 해석은 정반대였다. 경제가 어려울 수록 근로자들의 소비 수준을 높이기 위해 최저임금이 인상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최저임금 역시 고려했다.

코로나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등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선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가 문제라는 인식도 했다.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의 불공정 문제는 최저임금을 낮춰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사 각각의 주장은 결국 역대 최저치의 최저임금 인상률이 결정되면서 경영계의 승리로 돌아가는 형국이다. 다만 경영계 역시 ‘동결’을 관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없지 않다는 반응이다.

◇ ‘거름보다 밭이 중요’…공익위원들은 고용유지 택했다

공익위원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공익위원 단일안으로 최저임금을 결정해 버렸다. 지난 3년간 올랐던 최저임금 수준을 고려하면 올해는 더 낮은 수준의 인상률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코로나 상황이 지난 1998년 IMF 당시보다 더 위기라는 인식이 깔렸기 때문이다 .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후 지난 3~5월 국내 취업자 감소폭은 87만명을 기록했다. 이는 IMF 외환위기 당시 1998년 1~3월의 103만명에는 미치지 못한 수치다.

그러나 IMF 때는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량 실직이 주를 이뤘고, 이번 코로나 사태는 비정규직과 임시·일용직, 특수고용직을 위주로 타격이 큰 상황이다. 이들은 대부분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이 고용하는 취약계층으로 최저임금 인상의 여파를 그대로 받는다는 특성이 있다.

14일 오후 서울 강서구 한국공항공사 앞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KAC공항서비스지부 등이 연 한국공항공사 전국 14개 공항 자회사노동자 준법투쟁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평생 일해도 최저임금, 제대로 받아보자'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고용행정통계로 본 2020년 6월 노동 시장 동향을 보면 국내 제조업의 경우 업황 부진으로 지난해 9월 고용보험 가입자 숫자가 감소세로 전환된 이후 한번도 반등하지 못하고 쭉 내리막길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소비·생산·수출 모두 위축되고, 취업자 감소폭이 확대되고 있다"며 "(6월 통계는) 1998년 통계 생산 이후 최대 감소폭"이라고 했다. 고용보험으로 사회안전망 내에 있다고 여겨지는 근로자 역시 코로나로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으로 볼 때, 최저임금 결정의 키를 쥐고 있는 공익위원들은 ‘임금 인상’보다는 ‘고용 유지’ 쪽에 무게를 실은 것으로 보인다.

한 공익위원은 "(경기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가장 먼저 노동력을 조정하고, 최저임금이 오르게 되면 노동 시장에서 일자리가 줄어들 여지가 크다"며 "이렇게 되면 오히려 근로자의 생계에 훨씬 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다만 이번 최저임금 1.5% 인상은 최저임금에 어떤 항목을 넣는지를 따지는 산입범위 확대를 고려했을 때 오히려 삭감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판도 나온다. 앞으로 2024년까지 정기 상여금과 복리후생비가 단계적으로 최저임금에 포함될 예정인데, 이렇게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되면 사업주는 근로자의 임금을 인상액보다 적게 올려주더라도 최저임금 위반을 피할 수 있게 된다.

◇ 정부 의지대로 최저임금 요동…제도 개편 필요성 대두

최저임금 결정 구조가 노·사 대립이 클수록 공익위원에 대한 의존이 높아진다는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 노사 양측이 평행선을 그려 협상에 진척을 보이지 못할 때는 공익위원들이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줘야만 논의가 끝난다는 것이다.

이번 최저임금 의결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났다. 심의 초기부터 노·사는 각각 1만원 인상, 삭감을 주장하며 대립했고, 결국 전날 있었던 최저임금위 제8차 전원회의에서 공익위원들은 0.3~6.1% 인상이라는 ‘심의 촉진구간’을 설정했다. 근로자 위원들과 사용자 위원들은 최종 수정안으로 각각 6.1% 인상(9110원), 사용자 0.52% 인상(8635원)을 내놨으나, 의견을 좁혀지지 않았고, 공익위원들은 1.5% 인상(8720원)안을 단일안으로 제시했다.

근로자 위원인 이동호 한국노총 사무총장과 한국노총 소속 근로자위원들이 14일 새벽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열린 제9차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공익위원들의 1.5% 인상안 제시에 집단 퇴장을 선언한 뒤 청사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에 반발한 한국노총 측 근로자 위원 5명이 심의 보이콧을 선언했고, 앞서 회의에 나오지 않았던 민주노총 추천 4명의 근로자 위원에 더해 근로자 위원 전원이 심의에 참여하지 않는 상황이 그려졌다. 사용자 위원 측에서도 최저임금 동결이 관철되지 않은 것에 대해 반발한 소상공인연합회 소속 위원 2명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결국 남은 사용자 위원 6명과 공익위원 9명만이 8720원안에 대한 표결을 진행했고, 8720원안은 찬성 8표, 반대 7표로 의결됐다. 공익위원안에 반대표를 던진 공익위원은 1명에 불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 공익위원들의 ‘캐스팅 보트’ 역할은 매년 반복된다. 정부가 ‘친노동’이냐, ‘친시장’이냐에 따라 공익위원들의 성향이 달라지는 모습도 보인다. 공익위원은 정부(고용노동부)가 전원 위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9명의 공익위원 가운데 1명은 고용부에서 파견하는 상임직이다. 처음부터 정부 입김이 셀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7~2018년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올랐을 때도 정부가 ‘친노동’ 기조의 공익위원들을 뽑았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2018년의 경우 공익위원들이 지나치게 노동계 편을 든다는 이유로 경영계가 최저임금 심의를 보이콧 했다. 결국 새로 뽑힌 공익위원들은 정부·여당의 ‘최저임금 속도조절론’에 기대 2년 연속으로 낮은 수준의 인상안을 결정지었다.

제도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체계, 즉 위원회 구성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가 지난 2018년 말 추진했던 최저임금위원회 개편안이 그 하나다.

정부 개편안에 따르면 최저임금위원회는 다음 년도 인상 범위를 정하는 구간설정위원회와 정해진 인상 범위에서 금액을 최종 결정하는 결정위원회로 나눈다. 공익위원들은 정부 단독 위촉권을 없애고, 국회 추천권을 만들어 중립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이 안은 20대 국회에서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최저임금위 구성 변화도 중요하지만 전문성을 먼저라는 이야기도 있다. 학계 한 관계자는 "최저임금위원회는 최저임금을 의결할 때만 모이기 때문에 지난 1년간 최저임금의 인상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지속적으로, 또 면밀하게 분석하는 일에 대해서는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며 "위원회 구성을 바꾸기에 앞서 최저임금위원회가 사회적 기구로서 충분한 역할과 전문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상설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