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 30년 고정금리에 소득·집값 기준 느슨
분기마다 판매량 한도 정해져 공급 불안정

저금리 정책 금융 상품 중 유일하게 소득 제한이 없어 맞벌이 부부 등이 주로 이용하는 적격대출이 시중은행 대부분에서 취급되지 않고 있어 사실상 ‘개점 휴업’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 정책에 따라 적격대출 한도가 매년 줄어드는 가운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가계대출이 급증하자 은행들까지 적격대출 취급에 소극적으로 돌아선 데 따른 것이다.

4일 은행권에 따르면 주요 은행 중 현재 적격대출을 취급하는 곳은 우리은행과 SC제일은행, 씨티은행 세 곳 뿐인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국민·기업·NH농협은행은 올해 초 상반기 적격대출 한도를 일찌감치 소진하고 판매를 접었다. 하나은행은 지난달 4일자로 2분기 적격대출 판매를 마감했고, 신한은행은 올해 적격대출을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우리은행과 SC제일은행은 이달 말까지 적격대출이 안정적으로 공급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지만 씨티은행은 조만간 한도가 소진될 전망이다.

조선DB

적격대출은 대표적인 저금리 정책 금융 상품 중 하나로, 소득 제한이 없어 맞벌이 부부나 자산이 없는 고소득자의 수요가 높다. 시중은행 주택담보대출과 금리는 큰 차이가 없지만, 최장 30년간 고정금리로 이용할 수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집값 기준도 9억원 이하로 보금자리론(6억원 이하)보다 기준이 덜 까다롭다. 은행은 주택금융공사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판매 창구 역할을 하는데, 매 분기별로 한도를 받아 판매한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적격대출은 툭하면 판매가 중단되는 등 안정적인 공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올해 판매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신한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은행들은 모두 하반기는 돼야 적격대출 판매 재개가 가능하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분기 한도를 받아오면 대부분 한 달도 안 돼 소진된다"며 "한도가 너무 낮다보니 소수의 소비자에게만 판매가 가능하고, 이는 오히려 불만을 키울 수 있어 아예 판매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이는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 기조에 따라 적격대출 한도가 줄어든 영향이 크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18년 ‘가계부채 위험요인 점검 및 향후 대응방안’을 발표하며 적격대출 공급 한도를 매년 1조원씩 차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2018년 11조~12조원에 달했던 적격대출 한도는 지난해 10조원, 올해 9조원까지 낮아진 상황이다.

적격대출 추가 한도를 받기 위해선 커버드본드 발행이 필요하다는 점도 은행이 한도를 가져오는 데 장애물로 지목되고 있다. 커버드본드는 금융회사가 보유한 주택담보대출 등 우량자산을 담보로 발행하는 담보부채권이다. 올해 적격대출 한도 9조원 중 5조원은 은행별로 전분기 실적 등을 바탕으로 책정하되, 최대 1조원(20%)을 넘을 수 없다. 나머지 4조원은 각 은행의 커버드본드(이중상환청구권부채권) 발행 실적에 따라 배정된다.

예대율 산정에 커버드본드가 반영되는 만큼 은행권도 발행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커버드본드 시장 자체가 활성화되지 않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커버드본드는 관리 자체가 어려운데다, 발행해도 고유동성 자산으로 인정되지 않다보니 이를 품어줄 금융기관이 적은 상황"이라며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다보니 커버드본드를 적극적으로 발행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적격대출 취급에 부담을 느끼는 은행권의 태도 역시 적격대출 조기 소진의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해 주금공이 설정한 적격대출 한도는 10조원이었지만, 실제 은행은 8조5000억원을 판매하는 데 그쳤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결국 수익성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라며 "주금공으로부터 위탁 수수료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주담대 취급에 따르는 업무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역마진에 가깝다"고 말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가계부채가 급증한 점 역시 은행권이 적격대출을 소극적으로 취급하는 이유다.

적격대출의 조기 소진이 잦아지자 대출 수요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한 주택 매매 예정자는 "적격대출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서민인데, 이들을 위한 선택지가 너무 적다"며 "예고도 없이 툭하면 소진되다보니 내집마련 계획에도 차질이 생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