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대공황(Great Depression)’보다 ‘대봉쇄(The Great Lockdown)’를 두려워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를 과거 대공황에 빗대 지칭한 말이다. 여기서 봉쇄는 사람들의 발을 묶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식량 반출을 막는 ‘식량 민족주의’를 말한다.

BBC는 국제연합(UN) 식량농업기구(FAO)가 최근 "코로나19가 전 세계 식량 공급체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고 있다. 제때에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4월이나 5월 중에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며 "손 놓고 있는다면 글로벌 식량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21일(현지 시각) 전했다.

주변에 먹을 것이 넘쳐나는데, 괜한 걱정이 아닐까. 그러나 주요 곡물 수출국가들은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기 시작하자 이미 ‘식량 국경’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자국 내 식량 자원 확보를 위한 조치다. 생산량의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는 뜻.

22일 태국 방콕의 왓보우리웨티한 사원 앞에서 태국인들이 정부가 배급하는 식료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다.

세계 최대 밀 생산국가인 러시아는 곡물 품귀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달 열흘간 곡물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했다. 주요 도시의 유통매장에서 식품 사재기 현상이 벌어진 데 따른 조치다. 러시아 정부는 ‘앞으로 곡물 수출은 700만톤 이내에서만 하겠다’고 선언했다. 밀가루 생산량에 있어 러시아와 쌍벽을 이루는 카자흐스탄 역시 최근 밀과 당근, 설탕, 감자를 모조리 수출 금지 대상에 올렸다. 두 나라가 밀 수출길을 막자 시카고선물거래소(CME) 밀 선물 가격은 보름 만에 15%가 넘게 뛰었다.

쌀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3위 쌀 수출국인 베트남은 지난달 27일 자국 내 식량 확보 차원에서 수출을 금지했다가, 이달 10일부터 40만톤만 수출 쿼터제로 허용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도 최근 쌀 수출을 금지했다. 이 와중에 세계 최대 쌀 재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이 이미 전 중국인이 1년간 소비할 만큼 많은 쌀과 밀을 비축하고 있음에도 ‘더 많이 확보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쌀 값 역시 치솟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쌀 생산국가인 태국의 쌀 수출가는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밖에도 파키스탄이 지난달 25일부터 양파 수출을, 세르비아는 핵심 수출 품목인 해바라기유 해외 반출을 중단했다.

데보라 엘름스 아시아무역센터 소장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로) 보호주의가 앞으로 한층 강화될 수 있다"며 "주요 생산국들이 식량 재고와 식량 공급, 식량 안보에 대해 불안해 할수록 식량 수출을 중단하거나 수입을 제한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가장 먼저 아프리카와 중동 일대 빈국(貧國)들이 타격을 입는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은 21일(현지 시각) 발표한 ‘식량위기에 대한 제 4차 연례 글로벌 보고서’에서 "이 추세가 이어질 경우 지구상에서 심각한 기아로 고통 받는 인구는 지난해(1억3500만명)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다"고 경고했다.

인도 카슈미르주 수도 스리나가르의 근로자들이 주민들에게 배급할 밀가루를 소분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이 길어질 경우 예멘, 콩고민주공화국, 아프가니스탄, 베네수엘라, 에티오피아, 남수단, 수단, 시리아, 나이지리아, 아이티 등 약 10개국이 분쟁이나 기후변화 등의 영향으로 식량 부족 사태를 겪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이집트, 알제리 같은 동아프리카와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으로 식량 위기가 번질 가능성이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전에 세계적인 가뭄으로 곡물가가 치솟으면 아프리카에서 제일 먼저 식량 폭동이 벌어졌다"며 "러시아가 가뭄에 따른 생산량 감소를 이유로 밀 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자, 중동 지역 식품 가격이 폭등하고, 그 결과 ‘아랍의 봄’이 태동했다는 점을 떠올려보라"고 전했다.

데이비드 비즐리 WFP 대표는 이날 열린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화상회의에서 "우리는 몇 달 안에 대규모의 복합적인 기근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우리 쪽에 시간이 없다. 현명하고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날 주요 20개국(G20) 농업 담당 장관 역시 긴급 화상회의 후 성명을 통해 "정당화할 수 없는 수출제한 조치는 가격의 급등락을 초래해 식량의 안전을 위협한다"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이동제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전 세계 식량 공급망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 역시 식량 안보를 그저 남일로 취급하긴 곤란한 처지다. 우리 나라는 쌀을 제외한 곡물 자급률은 20%대 수준에 그치고 있어 쌀 이외의 곡물 조달에 대해선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옥수수 같은 곡물 수입에 차질이 빚어질 경우 축산업에 가해질 타격도 걱정해야 한다. 글로벌 식량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나타나는 위기는 이전에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파를 짐작하기 어렵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농업 생산력 대부분을 외국인 근로자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농업 구조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미국 포린폴리시(FP)는 최근 "밀, 옥수수, 콩처럼 미국 농가가 재배하는 주요 작물은 대부분 기계로 수확하기 때문에 국경 폐쇄의 영향을 덜 받지만, 과일이나 채소를 수확하려면 숙련 노동자가 필요하다"며 "이들 분야는 ‘노동 인력의 이동제한’ 기간이 길어질 경우 치명적인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봉쇄 조치에 따른 물류 차질로 식품을 못팔아 생기는 단기적인 손해 뿐 아니라, 일손 부족에 따른 장기적인 인력 개편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