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는 재개발로 낡은 주택가가 철거되고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 투표 성향이 진보화된다는 속설이 있다. 재개발 과정에서 새로 생긴 중소형 아파트에는 이전에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입주하는 경우가 많고, 자연히 보수 세력 지지자보다는 진보 세력 지지자가 많아진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있다. 부동산 전문가인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2011년 저서 '부동산은 끝났다'에서 "중대형 아파트가 밀집된 고소득층은 한나라당에 주로 투표했다. 그 반대의 경우는 민주당이나 야당"이라면서 "때문에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재개발되어 아파트로 바뀌면 투표 성향도 확 달라진다. 한때 야당의 아성이었던 곳들이 여당의 표밭이 된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고 적었다. 이는 재개발 이전보다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들로 유권자가 바뀐 사정에 주목한 해석이다. 이번 총선에선 어땠을까.
18일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 20대 총선 이후 4년 동안 서울에 들어선 1000가구 이상 재개발 아파트는 총 27개 단지였다. 이 중 신길동 래미안에스티움과 신길동 보라매SK뷰가 같은 동(洞)에서 신축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동별로는 26개동에서 재개발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들 지역의 20대 총선과 21대 총선의 투표 성향 변화를 살펴보니, 속설처럼 투표 성향이 확 바뀌진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총 26개동 중 민주당에서 통합당으로 투표 성향이 바뀐 곳은 단 한 곳이었다. 오히려 4개동은 지난 20대 총선 때 새누리당 후보에게 가장 많이 투표했는데, 이번엔 민주당을 택했다. 국민의당에서 민주당으로 지지후보가 바뀐 곳도 한 곳 있었고, 나머지 20개동은 20대와 21대 총선의 선택지가 같았다.
대부분은 투표 성향 변화가 없었다. 신길7동의 경우 래미안에스티움(2017년 4월, 1722가구)과 신길보라매SK뷰(2020년 1월, 1546가구)가 재개발돼 4년 전과 비교할 때 주민 구성의 변화가 비교적 크다. 이곳에선 20대 총선 땐 민주당이 40%, 새누리당이 39%를 얻으며 박빙의 승부를 했다. 이번 총선에서도 민주당 48%, 통합당 45%로 경합을 보였다. 이번 총선 기준 신길7동 총 선거인 수는 1만445명. 두 아파트 단지 가구수를 더하면 3178가구로 재개발로 인한 주민 변화가 비교적 컸는데도 투표 성향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왕십리센트라스(1·2차) 2529가구가 입주한 중구성동구갑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총선에서 왕십리도선동의 경우 전체 1만4483표 중 민주당이 51%, 통합당이 44%를 득표했다. 4년 전 총선 때도 민주당이 45%, 새누리당이 39%를 득표해 큰 변화를 찾기는 어렵다.
반면 만리동2가 서울역센트럴자이, 금호동1가 e편한세상금호파크힐스, 장위동 래미안장위퍼스트하이, 신월동 목동센트럴아이파크위브 등이 속한 동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에게 가장 많은 표를 줬는데, 이번 총선 땐 민주당 후보가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진보화의 예로 불 수 있는 지역들이다. e편한세상서울대입구가 속한 봉천동은 국민의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었다.
황희 더불어민주당 당선인과 송한섭 미래통합당 후보가 맞붙은 양천구갑 선거에서는 황희 당선인이 51.8%, 송한섭 후보가 44.9%를 득표했다. 하지만 신정4구역을 재개발해 2016년 5월 입주한 목동힐스테이트가 속한 신정1동으로만 투표 결과를 좁혀보면, 송 후보가 49%를 득표해 47%를 득표한 황 당선인을 앞섰다. 신정1동은 지난 20대 총선에서 민주당 득표율이 50%로 새누리당(42%)을 꽤 앞섰던 곳이다. 재개발로 보수화됐다는 해석이 나올 수도 있는 예다.
전문가들은 재개발로 지역의 정치 성향이 바뀌는 것도 지역별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심교언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는 "재개발로 새 아파트가 들어서도 과거처럼 나이 많은 중산층이 입주한다기보다 소형 평형에 젊은 가구가 입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면서 "강남이나 용산구 한남동 등 대표적인 부촌 인근에서 재개발이 된다면 보수화가 나타날 수 있지만, 대부분 동네에선 이같은 성향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