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동료 성추행한 대형병원 인턴…정직 후 병원 복귀
청와대 국민청원 "국민 안전 위해 면허 취소해야" 5만명 동의
현행 의료법상 의사면허 취소 어려워… 면허정지도 5년간 4명뿐
해외 선진국선 '의사 성범죄' 엄단… 법개정안 국회 문턱서 못 넘어

'n번방 사건'으로 성범죄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분이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지난달 30일 서울 한 대형병원에서 여성 환자와 동료를 상습 성추행·성희롱한 인턴 의사 A씨가 정직 3개월만에 병원으로 복귀하면서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병원 측은 "대기발령 상태로 전환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A씨의 의사 면허는 징계와 관계 없이 유지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A씨의 면허를 취소해야한다는 요구가 늘고 있다.

지난 1일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마취 중인 환자에게 변태 행위를 한 대형병원 산부인과 인턴-국민의 안전을 위해 병원 공개 및 의사 면허 취소를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7일 만에 5만3400명이 넘는 동의를 얻었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도 보도자료를 내고 "A씨의 면허를 취소하고 재교부를 엄격히 제한해야 또다른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 성범죄 의사 면허취소 '0건'… 언제까지 '면죄부' 받나
지난해 9월말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산부인과 인턴으로 수련받던 남성 A씨는 마취를 받고 수술실에서 수술 대기중이던 여성 환자의 신체를 반복적으로 만지는 등 강제추행을 저질렀다. 이를 본 전공의가 만류했지만, A씨의 부적절한 행동은 이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간호사에게도 여러 차례 성희롱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병원은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의사직 교육위원회를 열고 A씨에게 '정직 3개월'의 징계처분을 내렸다. A씨는 부당하다며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징계취소 신청을 냈지만, 노동위가 이를 기각했다. 현재 A씨는 병원으로 다시 복귀해 대기발령 상태다.

일각에서는 A씨에 대한 처벌 수위가 너무 약한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환자를 대상으로 한 성추행을 저질러 징계를 받았지만 의사 면허는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성범죄는 의사면허 취소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의료법에 따르면 의사면허 취소 사유는 △정신질환자, 마약중독자, 금치산자 △면허 대여 △진료비 거짓청구 등이 있다. 성범죄 등 형사사건 기소 조항은 따로 없다.

다만 보건복지부는 의료법 제66조와 의료법 시행령 제32조상 자격정지 사유인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따른 '의료인의 품위 손상'에 성범죄를 포함 해석해, 1년 이내 범위에서 의사 면허 정지를 내릴 수 있다. 현행법상 A씨에게 부과될 수 있는 것은 '면허정지'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의사가 성범죄를 저질러도 면허 정지를 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면허를 정지당한 의사 74명 중 성범죄가 사유인 경우는 4명뿐이었다. 같은 기간 성범죄로 의사 면허가 취소된 사례는 '0명'이었다.

의사면허가 취소돼도 다시 면허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 면허가 취소돼도 1~3년 안에 재교부 신청을 하면 회복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면허 재교부 신청한 의사 109명 중 약 97%에 달하는 106명이 면허를 회복했다.

지난 1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산부인과 수련 중 환자를 성추행 한 인턴의 의사 면허 취소를 요구하는 청원글이 올라와 7일 기준 약 5만명이 참여했다.

◇ 의사 성범죄 증가세… 법조계 "의료법 개정해 취소 사유에 성범죄 넣어야"
의사들의 성관련 일탈 행위는 점차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성범죄를 저질러 입건된 전문직 4760명 중 의사는 611명(12.8%)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중 강간 및 강제추행으로 검거된 의사는 539명에 달한다. 2014년 83명에서 2018년 163명으로 약 2배 증가했다.

2018년에는 한 개인병원 의사가 간호조무사를 12년 동안 성폭행하고 불법 촬영물로 협박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의사 면허는 그대로 유지됐다. 2007년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기 위해 내원한 여성환자를 성폭행한 의사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그 이후에도 병원을 운영했다.

전문가들은 현행 의료법을 개정해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에 대한 면허 취소 규정을 추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n번방 사건으로 성범죄에 대한 사회의 공분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서울 한 대형병원에서 여성 환자와 동료를 상습 성추행·성희롱한 인턴 의사의 소식은 충격을 더했다.

의사 출신인 이준석 변호사는 "의료법 제8조 의사면허 결격사유에 성폭력 특별법 등 알맞은 법 조항을 넣는다면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 정이원 변호사는 "환자는 진료를 받을 때 눈을 감거나 엎드려 있어, 피해 상황을 알기 어렵고 진료 행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범죄가 발생해도) 가해 의사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다"며 "의사를 성범죄로 고소한 경우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판결이 나는 경우도 많아, 법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에 대한 면허 취소 관련해, 법개정 움직임은 꾸준히 있어 왔다. 지난 2000년부터 현재까지 의사 면허를 강력하게 규제하기 위한 의료법 개정안은 20건 이상 발의됐다. 하지만 이들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현재 20대 국회에도 10여 건의 개정안이 법안 통과를 기다리는 상태다.

해외에서는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의 면허를 보다 강력하게 제재한다. 독일은 의료인이 성범죄로 실형을 선고 받으면 의사 면허를 취소한다. 미국도 의사가 환자를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를 경우 형이 확정되지 않더라도 면허를 정지시키며, 형이 확정되면 면허를 취소시켜 면허 재취득을 불가능하도록 한다.

대한의사협회는 "(징계를 받은 산부인과 인턴 관련) 사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으며 사실이 확인된다면 중앙윤리위원회에 회부할 수도 있다"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