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경영권을 놓고 조원태 한진 회장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강성부 KCGI 사장, 권홍사 반도건설 회장 등 3자 연합이 벌이는 분쟁이 진실 공방의 진흙탕 싸움으로 변했다.

조원태 회장 진영은 지난 16일 오후 3자 연합의 한 축인 권홍사 회장이 지난해 12월 자신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해달라고 요구했다며 ‘폭로’했고, 3자 연합 측은 조원태 회장이 도와달라고 말해 만난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를 악의적으로 편집했다며 반박했다. 두 진영은 12월 당시 반도건설 자회사 대호개발이 보유한 한진칼 지분 6.28%에 대해 적법하게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놓고 법적 분쟁을 벌이고 있다. 당시 반도건설이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허위 공시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양 당사자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 그렇듯, 진실은 어느 한 중간에 있다. 양쪽이 주장하는 사안에 대한 사실관계를 정리해 보았다.

(왼쪽부터)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권홍사 반도건설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① 권홍사 회장은 재계를 모르는가?

16일 한진그룹은 권 회장이 명예회장 자리 등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서 핵심은 권 회장이 지방 건설사 오너로 돈만 많고 실제 재계의 속사정이나 업무 처리 방식 등에 대해 모르는가이다. 권 회장이 그저 본인 돈이 많은 것만 믿고 무분별한 요구를 했다면 한진 측의 폭로가 설득력 있지만, 그가 재계에서 활동 경험이 있다면 그의 해명이 설득력이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1980년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며, 반도건설을 부산·경남 대표 건설사로 일궜다. 반도건설은 호남계 건설사인 호반·중흥과 함께 2000년대 급성장했다.

권 회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중앙 무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2005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국내 건설사들의 모임인 대한건설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듬해부터는 대한건설협회의 명예회장직을 맡고 있다. 노무현 정부와의 연줄을 바탕으로 정치권과 맺은 네트워크도 없지 않다는 평가다. 그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특별수행원 48명에 포함돼 정몽구 현대차 회장,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등과 함께 북한 땅을 밟았다.

②조원태 회장과 권홍사 회장은 이전부터 알았나?

조원태 회장과 권 회장은 여러 차례 접촉하면서 함께 골프도 치는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승마광’으로 유명한 권 회장은 1998년부터 서울시승마협회 회장을 비롯해 대한체육회 이사, 씨름협회 부회장 등 다양한 스포츠 관련 활동을 하면서 고(故) 조양호 회장과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 그 인연으로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과 조원태 회장과도 알게 됐다.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아들 조원태 회장의 모습.

조양호 회장과의 친분으로 처음 한진칼 주식을 산 권 회장은 이후에도 반도건설 계열사인 대호개발과 한영개발, 반도개발 등을 통해 주도적으로 한진칼 지분을 확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건설 측은 지난 1월 초까지만 해도 "한진칼이 저평가돼 있다고 판단해 단순투자 목적으로 지분을 매입했다"고 주장했지만, 업계에선 한진칼 경영권 분쟁에서 몸값을 불리기 위한 전략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전날 반도건설 측은 작년 4월 조양호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 후 3개월여가 지난 7월 조원태 회장이 권 회장을 2~3차례 만나 백기사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업계 안팎에선 지난해 12월 이뤄진 만남이 권 회장이 보유한 지분에 대한 마지막 ‘딜’을 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권 회장은 이명희 고문과도 여러 차례 회동을 가졌다는 게 항공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이후 권 회장은 사위 신동철 반도건설 전무를 앞세워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KCGI 측과 3자 협상을 이어갔다. 결국 이들은 지난 1월 31일 조원태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을 반대하는 ‘한진그룹 정상화를 위한 한진칼 주주연합’을 구성하고 한진칼 지분 공동 보유를 최종 합의했다.

③ 권홍사의 진짜 요구사항은 명예회장인가?

한진칼에 따르면 12월 10일과 16일 권 회장은 ▲조원태 회장에게 반도건설 몫의 등기이사 자리 ▲권 회장의 명예회장 추대 ▲한진 보유 부동산 공동 개발권 등을 요구했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실리’는 등기이사 자리다. 실제 한진그룹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반도건설 지분은 6.28%로, 조원태 회장과 비슷한 수준에 불과하고 델타항공이나 KCGI보다 적다. 따라서 3가지 요구 사항 모두 반도건설의 추가 지분 보유를 염두에 둔 제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탄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실제 반도건설은 이후 수십차례 장내 매수를 통해 한진칼 지분을 13.3%까지 끌어올렸다.

반도홀딩스, 반도건설, 반도개발, 대호개발, 한영개발 등 반도건설 주력 계열사로 한진칼 지분 매입과 관련된 기업들의 유동자산(별도재무제표 기준)을 모두 합치면 2018년말 기준 1조2900억원에 달한다. 같은 기간 반도그룹 계열사들의 자산을 모두 더하면 4조200억원이다. 반면 부채는 7100억원에 지나지 않는다. 권홍사 회장은 차입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양쪽의 ‘딜’이 결렬된 핵심적인 쟁점은 반도건설의 경영 참여 요구였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명예회장직은 권 회장 입장에서 굳이 실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만 불러일으키는 행위다. 언론 노출 등을 꺼리는 권 회장 특성을 감안하면 진지하게 협상장에 들고나올 카드는 아니라는 얘기다. 반도건설은 16일 오후 조원태 회장 진영의 폭로 직후 "권 회장의 개인적인 사안일 뿐"이라는 입장을 내면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 강남구 반도건설 사옥.

④어쩌다 이 건이 수면위로 올라왔나?

조원태 회장과 권 회장의 회동 내용이 알려진 것은 반도건설 지분을 놓고 의결권을 보장해달라는 내용의 가처분 신청을 3자 연합 측에서 하고, 법정에서 공방이 진행되면서다. 3자 연합 측의 가처분은 조원태 회장 측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미리 선수를 친 데 가깝다는 게 항공업계의 관측이다. 실제로 한진칼은 16일 금융감독원에 반도건설이 공시를 위반했다며 조사요청서를 냈다.

하지만 굳이 조원태 회장이 권 회장의 막후 협상 내용을 일일이 공개할 필요는 없었다. 권 회장과 조원태 회장 또는 이명희 고문과의 회동 내용 등이 알려지면, 조 회장 입장에서도 이미지를 구길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권 회장이 명예회장을 요구했다는 주장까지 내놓으면서 사실상 조원태 회장은 반도건설과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조원태 회장이 경영권 분쟁에서 이겨도 반도건설 지분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것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한진칼이 굳이 이 문제를 폭로 형식으로 꺼낸 이유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소액 주주 상대 여론전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조원태 회장과 3자 연합이 경쟁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그만큼 개인 주주를 의식하기 때문"이라며 "상대방의 대중적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정치권의 네거티브 선거전 양상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