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우리나라를 강타한 가운데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다. 과거 비슷한 형태의 백신, 치료제를 개발한 경험이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지만, 안전성과 효능을 입증하기까지 거쳐야 할 관문이 많아 상용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 연구원이 백신 개발을 위한 실험을 하고 있다. 이 회사를 비롯해 국내 제약바이오기업 15곳이 우한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지난 9일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 15개사가 우한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 연구개발(R&D)에 나섰다고 밝혔다. 백신을 개발하는 회사가 다섯 곳이고 치료제는 열 곳에서 개발에 착수했다.

예방 백신 개발은 GC녹십자, SK바이오사이언스 등 백신 개발 경험이 있는 기업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GC녹십자와 SK바이오사이언스는 질병관리본부의 우한 코로나 백신·치료제 개발에 지원했다.

GC녹십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독성을 약하게 해서 주사하는 약독화 백신이 아니라 바이러스의 표면에 있는 단백질을 백신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바이러스 자체를 쓰지 않아 안전성이 확보됐다는 장점이 있다. 회사는 바이러스 단백질 중에서 인체에서 면역반응을 가장 잘 유도하는 종류를 고르고, 이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미생물이나 동물세포에 넣어 대량생산하는 유전자재조합 기술을 이용한다. 치료제는 우한 코로나 환자의 혈액에서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항체를 찾아 개발할 계획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앞서 2017년 우한 코로나와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질병인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백신 개발을 진행한 바 있다. 회사는 이번에 백신 생산에서 공급·상업화 과정을 한 번에 진행할 수 있도록 국내외 유관 기관과 업무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스마젠은 국제백신연구소와 연구 용역 계약을 통해 백신 개발에 착수했고, 지플러스생명과학은 특이하게 식물에 바이러스 유전자를 삽입해 백신 물질을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보령바이오파마도 백신 개발 의사를 밝혔다.

치료제 개발에서는 셀트리온이 국내 의료 기관에서 우한 코로나 완치자의 혈액을 공급받아 치료용 항체를 분리하기로 했다. 이 회사는 그동안 다양한 항체 의약품의 복제약(바이오시밀러)을 개발한 경험이 있어 상용화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유틸렉스도 항체 신약 개발에 착수했고, 지노믹트리는 충남대와 함께 우한 코로나 진단 키트와 항바이러스성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치료제는 완전히 새로운 후보 물질을 발견하는 연구와 함께 기존에 출시했던 의약품 중에서 우한 코로나에 듣는 약물을 찾아내는 '약물 재창출' 방식의 개발이 병행되고 있다.

중국 우한에서 퍼지기 시작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SARS-CoV-2)의 전자현미경 사진.

이뮨메드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인플루엔자(독감) 치료제로 개발하던 'HzVSFv13' 주사제를 우한 코로나 치료제로 임상 2상 시험하는 승인을 받아 서울대병원에서 환자에게 접종하고 있다. 코미팜도 식약처에 다른 바이러스 치료제로 개발 중인 '파나픽스'를 우한 코로나 환자 치료에 쓰는 긴급 임상 시험 계획을 신청했다. 파나픽스는 우한 코로나 환자의 사망 원인으로 알려진 면역 물질 폭증을 억제할 수 있다고 회사는 밝혔다.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은 기도의 만성염증 억제 효과가 있는 흡입용 스테로이드제제로 임상 1상 시험을 시작할 계획이다. 노바셀테크놀로지는 면역 치료제(NCP112)를, 셀리버리는 중증패혈증 치료제(iCP-NI)를 우한 코로나 환자의 증세를 억제하는 데 사용할 예정이다.

젬백스는 C형 간염과 에이즈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치료제를 우한 코로나에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카이노스메드는 한국파스퇴르연구소와 신약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백신·치료제 개발을 위해 국내 정부 기관과 연구소, 제약사 등이 힘을 결집하는 민관 협력 모델도 활성화되고 있다. 국립보건연구원은 방역에 필요한 신속 진단제와 백신·치료제 개발을 위해 최근 8개 연구 과제를 공고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한국화학연구원·한국파스퇴르연구소 등 국내 여러 연구 기관과 협력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원희목 제약바이오협회장은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백신과 치료제의 신속한 개발 등 의약주권을 지키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며 “제약·바이오 산업계의 연구개발 역량에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되는 민관 협력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말했다.

바이러스 전염병은 한번 폭풍이 지나가고 가라앉으면 그동안 진행하던 백신이나 치료제 연구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다. 환자가 없어지면 약을 개발해도 수익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2015년 국내를 강타했던 메르스 백신도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임상시험이 진행됐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번에는 연구 성과가 사장되지 않도록 정부와 산업계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