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16층 금융위원회 대회의실. 삼성생명·한화생명·미래에셋대우·교보생명·현대캐피탈·DB손해보험 등 금융사 6곳 최고경영자(CEO)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굳은 표정으로 은성수 금융위원장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들에게 족쇄가 될 수 있는 '금융그룹 감독 제도 개선 방안'이 논의됐기 때문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24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금융그룹 CEO·전문가 간담회'에 참석해 정부가 추진 중인 '금융그룹 통합감독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금융그룹 감독 제도란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삼성증권처럼 대기업 계열인 금융회사들을 한 금융그룹으로 간주해 감독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금융 자산 5조원 이상이고 그룹 내 금융사가 2곳 이상 있는 삼성·한화·미래에셋·교보·현대차·DB 등 6곳이 대상이다. 신한은행이 속한 신한금융지주나 한국투자증권이 속한 한국투자금융지주는 이미 금융지주회사법으로 규제를 받고 있어서 대상에서 빠졌다.

은 위원장은 이날 금융 그룹 차원의 위험 관리를 위해 지배 구조·내부 통제 등 비(非)재무적 위험까지 평가하고 공시 의무를 부과하는 등 규제를 더 강화하겠다는 개편안을 밝혔다. 금융그룹의 잠재적 위험 요인을 미리미리 관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금융시장에선 "리스크 방지라는 명분으로 대기업을 길들이려는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금융그룹으로 위험 전이 막는다며 규제 강화

금융그룹 감독 제도가 이번에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이미 2018년부터 모범 규준(가이드라인) 형식으로 시범 운영돼 왔다. 금융 계열사 간 과다 계상된 중복 자본은 빼고, 계열사 간 옮길 수 있는 위험(전이 위험)과 그룹 자산이 특정 산업에 집중됨으로써 발생 가능한 위험(집중 위험)을 평가해 자본을 더 쌓아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한마디로 삼성전자나 삼성카드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삼성생명 고객이 보험금을 못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금융위는 이날 개편안을 통해 기존 규제를 한층 강화할 뜻을 밝혔다. 위험 등급을 평가할 때 재무적 요인뿐 아니라 소유·지배 구조 적절성, 브랜드 연계 정도 등 비재무적 요소도 포함하겠다는 것이다. 또 전체 계열사 간 지분 구조와 출자 현황 등도 금융그룹 차원에서 공시하도록 할 방침이다. 예컨대 삼성생명의 주요 주주인 이건희 회장과 삼성물산이 포함된 금융그룹 전체의 지분 구조도(圖)를 공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은 정부가 금융회사 건전성을 핑계로 비(非)금융 계열사 경영에 간섭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삼성생명의 건전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점검하겠다는 명목으로 삼성물산의 경영 관련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김상조 정책실장이 공들여온 제도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정부의 민간 기업 경영권 개입을 심화시켜 민간의 경제 활력만 떨어뜨리는 탁상행정이라고 비판한다. 산업 발전에 맞춰 금융도 자율적으로 진화하는 글로벌 트렌드에 역행하는 조치라는 말이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는 "정부가 카드 수수료와 보험료, 대출 조건 등을 결정하고 국민연금을 동원해 기업 경영까지 간섭하고 있다"며 "이젠 국제 흐름이라는 모호한 이유를 갖다 붙여 그룹 금융 감독까지 들고나왔다"고 지적했다.

이 제도는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 중 하나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학자 시절부터 재벌 규제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김 실장은 지난달 금융위가 개최한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금융위 안팎에선 은 위원장이 전임 최종구 위원장과 달리 김 실장에게 번번이 밀려 작년 국민연금의 기업 경영 간섭이란 길을 터준 데 이어 이번에 금융그룹 감독까지 허용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미 재벌 규제는 충분히 이뤄지고 있는 상황인데 '집 위에 집을 지었다(옥상옥)'는 비판도 제기된다. 계열사 간 상호 지급 보증과 순환 출자가 금지돼 있고, 정보보호법상 데이터 교환이 어려워 시너지를 겨냥한 금융 상품 개발도 못 하는데 그룹 차원의 감독까지 받는 게 과하다는 말이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삼성은 금융위가 금융지주 전환을 막아놓고선 이제 와서 금융지주 차원에서 규제를 한다는 게 모순"이라며 "이미 공개된 지분율만 봐도 다 아는데 지배 구조 공시를 요구하는 것도 과도하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국회 통과가 안 되고 있으나, 정부가 모범 규준이라는 모호한 방책을 끄집어내 자의적 규제를 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