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삼성전자가 단행한 정기 임원 인사의 핵심 키워드는 '교수님'이었다. 신임 사장 승진자 4명 중 2명이 교수 출신이다. 삼성전자 네트워크사업부장을 맡은 전경훈(58) 사장은 포스텍(포항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로 일했고, 삼성전자 신임 종합기술원장에 오른 황성우(58) 사장은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교수였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학계에서 오랫동안 연구 활동을 하며 전문성을 쌓은 분들이 산업계로 뛰어들어 우수한 성과를 냈다는 점이 사장 승진의 배경"이라고 말했다.

'백면서생'으로 불리는 교수들이 최근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SK하이닉스·LG화학 등 대기업에서 최고경영자·고위 임원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교수 경력이 10년 이상인 정교수나 종신 교수 자리를 버리고 나와 기업으로 진출한 이들이 미래 기술과 먹거리를 책임지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은 학계의 우수한 연구 노하우가 필요하고, 교수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빠르게 상용화해 혁신하는 욕구가 크다"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교수 출신 사장님' 대거 등장

교수 출신 사장·고위 임원은 주로 기업의 미래 성장 동력과 신기술 개발을 담당한다. 전경훈 사장은 이재용 부회장이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꼽은 5G(5세대) 이동통신용 장비 사업을 책임진다. 전 사장은 1991~2012년까지 20년 넘게 포스텍 전자전기공학과 교수로 일했다. LTE·5G 같은 네트워크 기술을 연구하는 통신공학 전문가다.

삼성의 종기원장으로 5년, 10년 후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황성우 사장도 1995~2012년까지 고려대 전기전자전파공학부 교수였다. 황 사장은 교수 재직 시절 퀀텀닷(양자점)·그래핀 등 차세대 기술을 활용한 나노 소자 개발에 집중했다. 황 사장이 교수 시절 공동 집필한 '나노전자소자'는 세계적인 출판사 팬스탠퍼드를 통해 전 세계 대학생들의 교재로 쓰였다.

2018년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자리를 박차고 삼성디스플레이로 간 이창희(56) 차세대 연구실장(부사장)도 QLED (양자점발광다이오드) 등 미래 디스플레이 기술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이 부사장은 1997년 인하대 교수를 거쳐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국제정보디스플레이 학회의 석학 회원이다. 서울대에서는 공대 연구부학장, 반도체공동연구소장 등으로도 일했다. 삼성의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 대표이사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대 경제학 교수·한국개발연구원 소장 등을 거친 차문중(59) 사장이 맡고 있다.

세계 2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SK 하이닉스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출신인 이석희(55) 사장을 2018년 대표이사로 임명했다. 이 사장은 현대전자·인텔을 거쳐 KAIST 전자공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인텔 연구원 시절에는 최고 연구원에게 주는 '인텔 기술상'을 세 차례나 받았다. SK하이닉스는 작년 6월 미국 UCSD(샌디에이고캘리포니아대) 공대의 김영한(47) 교수를 전무급 수석연구위원으로 영입했다. 김 연구위원은 UCSD의 종신 교수 자리를 받았을 정도로 데이터 분야 석학이지만, SK하이닉스로 옮겨와 AI·빅데이터 연구를 담당한다.

LG화학은 2015년 서울대 화학부 종신 교수였던 이진규(57) 부사장을 소재 연구 총괄로 영입했다. 이 부사장은 반도체·배터리 등의 핵심 소재 개발에 필수인 무기 나노 소재 분야의 권위자다. 교수 재직 당시 100건이 넘는 학술 논문을 발표하고, 특허 역시 100여 건 이상 출원했을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포스코도 작년 정기 인사를 통해 포스텍 기계공학부의 박성진(52) 교수를 산학연협력실장으로 영입했다.

◇산학 간 공동 연구도 활발

직접 영입과 별개로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겸직을 허용해주면서 연구를 맡긴 경우도 많다. 삼성전자는 프린스턴대 세바스천 승(승현준) 교수, 코넬테크 대니얼 리(이동렬) 교수, 하버드대 위구연 석좌교수 등을 영입해 인공지능(AI)·로보틱스·자율주행차 등 미래 기술을 개발 중이다. LG전자는 작년 12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컴퓨터공학부의 조셉 림 교수를 AI 연구소 영상지능 연구 담당으로 영입했다. 네이버는 연구·개발(R&D) 자회사인 네이버랩스에 미국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김상배 교수를 기술 고문으로 영입했다. 김 교수는 네 다리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로봇 '치타'를 개발한 세계적인 로봇 전문가다.

◇인재 확보·기술 선점에 유리

교수 영입의 배경에는 원천 기술 확보 경쟁이 있다. 기업이 장기간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해 독보적인 지식을 쌓은 교수들을 데려와 기술 경쟁력을 끌어올리려 한다는 것이다. 인재 확보와 네트워크 확장에도 유리하다. 우수한 교수 밑에서 공부했던 연구원·박사들을 함께 영입하거나, 학회·연구단체들과 협업할 수 있다.

교수들도 기업의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자신이 개발한 신기술을 빠르게 상용화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으로 간다. 한 교수 출신 고위 임원은 "대학과 기업 간 기술의 간극을 메우면서 대학이 개발한 기술로 산업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연봉도 교수보다 기업인이 훨씬 더 많다. 재계 관계자는 "구글·페이스북·인텔 같은 해외 기업은 AI나 자율주행차 같은 미래 기술 분야를 아예 교수 출신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며 "한국에서도 점점 학계와 산업계 간 장벽이 무너지고 현장에서 뛰는 교수 출신 경영자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