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방송의 모습을 통해 본 중국 방송의 과거와 현재
라디오와는 달리 티브이는 대중 프로파간다 수단화하는 데 오래 걸려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권 국가, 또는 과거 사회주의를 경험했던 국가의 언론 체계는 소련의 그것을 빼닮아 있기 때문에, 소련을 보면 중국을 알 수 있다. 소련 언론체계의 세가지 축은 첫째,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Правда)', 둘째, 행정부 소속의 통신사 '타스(ТАСС∙Телеграфное Агентство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텔레그라프 에이전시 소비에트 소유즈)', 셋째, 방송은 '소련 중앙텔레비전(Центральное телевидение СССР)'이다.
중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행정부 소속의 신화통신사(신화사), 그리고 중국 중앙텔레비전(CCTV)의 세가지 축이다. 북한 역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조선중앙통신, 그리고 조선 중앙텔레비죤을 주요 언론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소련과 흡사하다. 지난 글에서는 소련의 당기관지∙통신사, 그리고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 언론의 이야기를 살펴 보았다. 이번에는 소련 방송의 모습을 통해 중국 방송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 본다.
소련 행정부에서 방송 관할 주요 당국은 '소련 고스 텔레 라디오(Гостелерадио СССР)'이다. '소련 텔레비전∙라디오 방송 국가위원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итет СССР по телевидению и радиовещанию)'의 약칭이다. '고스'가 국가의(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뜻을 담고 있다. 소련 건국후 1931년에 만들어졌다. 1931년부터 1939년까지는 텔레비전 시험 방송을 진행했다.
라디오는 러시아 혁명 중에 활용했기 때문에, 소련 건국 이전부터 방송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소련 건국 후 1922년에 라디오가 방송된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과 항일투쟁 시기인 1940년에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 선전에 활용했다. 북한에서는 1946년에 평양라디오방송이 생겼는데, 그 1년전인 1945년 '김일성장군 개선 환영대회' 임시 중계한 날을 기념일로 삼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방송 당국은 1949년 건국 한달후인 11월에 '광파 사업국(广播事业局)'으로 출범했다. 중국어로 전시(电视∙電視)는 텔레비전이고, 광파(广播∙廣播)는 라디오 또는 방송을 아우르는 말이다. 광파 사업국은 1982년에 '광파 전시부(广播电视部)'로, 1986년에는 영화(電影∙전영)까지 포함한 '광파 전영 전시부(广播电影电视部)'로, 2013년에 신문출판을 합쳐 '국가 신문출판 광전 총국(国家新闻出版广电总局)'으로, 2018년에 다시 '국가 광파 전시 총국(国家广播电视总局)'으로 되었다. 행정부인 국무원 직속이다.
소련 '중앙텔레비전(Центральное телевидение)'의 전신은 1938년 방송을 시작한 '모스크바 텔레비전 센터(Московский телецентр)'이다. 이 모스크바 텔레비전이 1951년에 '중앙텔레비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 존재했다. 중국에서는 1954년 모택동이 텔레비전 방송의 준비를 지시한 이후 소련의 모스크바텔레비전처럼 먼저 '북경 텔레비전(北京电视台)'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78년에 소련의 중앙텔레비전과 비슷하게 중국 '중앙텔레비전(中央电视台∙중앙 전시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북한도 처음에 '평양텔레비죤'이었다가 나중에 '조선 중앙텔레비죤'이 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은 소련 건국 초기 대중 프로파간다에서 그리 중요하게 대접받지 못했다. 워낙 텔레비전의 보급율이 낮았고, 우랄산맥이 유럽과 아시아를 갈랐으며, 동서로 길게뻗은 표준 시간대의 차이가 방송에 어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는 텔레비전을 활용한 선전 사업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텔레비전 프로파간다의 인식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오랜동안 텔레비전은 주요 매체가 아니었으며 1970년대가 되어서야 선전 매체로 인정받았다. 북한 역시 1970년 당대회 이후 텔레비전을 선전도구로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편 컬러 텔레비전 방송은 소련에서 1967년 개시되었다. 중국은 1973년에, 북한은 김일성 생일인 1974년 4월부터 컬러 방송을 시작했다.
소련 중앙텔레비전 산하에 차츰 채널들이 생겨나서 나중에는 6개의 전국 채널이 만들어졌다. 첫번째 기본 채널은 '제1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두번째 채널인 '제2 프로그램'은 '전연방 프로그램'이라고도 불렀다. 세번째 채널인 '제3 프로그램'은 교육을 목적으로 했다. '제5 프로그램'은 모스크바가 아닌 레닌그라드, 즉 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송출했다. '제6 프로그램'은 과학∙기술∙체육 등에 특화되었다. 소련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 그리고 각 자치공화국은 초기에는 '제1 프로그램'을, 그리고 나중에는 '제2 프로그램'까지 받아서 방송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지역언어 방송을 포함한 자체 방송을 했다. 1980년대 소련의 방송위성이 갖추어지고나서 여섯개의 전국권 채널이 방송되었는데, 모스크바 시간 기준으로 오후네시부터 오후여덟시까지가 전국권 방송 시간대였다고 한다.
중국 중앙텔레비전도 소련 중앙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단계적 다채널화가 이루어졌다. '제1종합 채널'을 필두로 재경, 종합예술, 국제, 체육, 영화, 군사∙농업, 드라마, 기록(다큐멘터리), 과학∙교육, 희곡(월극∙경극), 사회와 법, 뉴스, 어린이, 음악,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고화질전용 채널 등으로 많아졌다. 또 북경, 상해와 각 성(省)에 하나씩의 지역위성방송국(위시)을 만들어 중국 전역에서 볼 수 있게 하였다. 또 각 성(省)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지역방송도 만들었다.
소련의 방송은 당연히 내용을 사전 검열했다. 생방송은 지양되었다. 비속어, 폭력, 선정성, 마약 등은 금기시되었다. 소비에트 문화를 우월하게 강조하고 재즈등 서방 문화를 비하하는 음악,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이 방송되었다. 영화∙드라마는 거의 없었는데, 1960년대부터는 티브이용 영화도 나왔고 1970년대부터는 연속 시리즈물도 만들어졌다. 내용은 가족물이나 독일과의 전쟁등 애국적인 내용, 그리고 미국과의 첩보전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중국에서 방송을 볼 때 항일투쟁 관련 시리즈물이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이른바 '주선율(主旋律)' 제작물이 매우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소련 방송에서 뉴스는 국영통신사로부터 공급받는 내용 위주로 보도되었다. 중국의 경우 온나라가 단일한 표준 시간대이기 때문에 모든 지역방송국은 북경기준 저녁7시 중앙텔레비전의 메인뉴스 '신문 련파(新闻联播)'를 같은 시간에 방송해야만 한다. 신문련파의 메인앵커(主播∙주파)는 아나운서(播音员∙파음원) 신분 중에서 가장 당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며, 국가주석의 해외순방에도 동행한다.
소련에서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텔레비전 보급률이 급격히 높아졌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텔레비전 전파도 많이 잡히게 되었다. 소련 당국으로서는 이러한 변화와 개방의 추세에 대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중 선전 매체로서의 텔레비전 전략을 재수립해야만 했다. 시나브로 구소련 해체 이전 즈음 소련의 방송에서는 유럽과 남미 등의 오락성 제작물, 그리고 미국 헐리우드 영화도 방송되었다. 소련 방송에 서방의 방송을 모방한 토크쇼와 게임쇼가 등장했다.
1991년 구소련 해체후 일정 기간 동안 올리가르히들이 텔레비전 방송국을 장악했는데, 나중에 집권한 푸틴에 의해 통제되고 국영, 민영, 국∙민영혼합의 세 종류 방송국들이 혼재하는 체제로 재편되었다. 현대 중국 텔레비전 방송을 둘러싼 매체환경 하에서, 중앙텔레비전의 위상이 상대적으로는 여전히 공고하다 하더라도 전반적인 텔레비전 시청률 특히 젊은층의 시청률이 매우 낮아졌다. 이러한 추세는 현대의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긴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같이한 역사 등을 공유하는 특수한 관계이다. 위에서 소련 언론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중국의 방송 이야기를 통해 두나라의 공통점을 살펴 보았다. 우리는 한국 전쟁 이후 미국과 일본에 대한 관심과 교류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관심과 교류가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시장경제를 운위하는 러시아, 중국과 교역하며 상호 이익을 추구해 오고 있다. 시장이 협소한 한국으로서는 지역적으로도 붙어 있고 소비자의 규모도 큰 두 나라와의 경제적 거래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한 현대의 디지털 경제와 글로벌 교역이라는 두가지 테마만으로도 우리 젊은이들이 중국, 러시아 시장을 포함한 세계로 활동 범위를 넓힐 동인이 된다. 더구나 동북아의 정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될수록 육로로 연결된 경제권은 활성화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광의의 중국어권 시장과 러시아어권 시장도 함께 묶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 필자 오강돈은...
《중국시장과 소비자》(쌤앤파커스, 2013) 저자. (주)제일기획에 입사하여 하이트맥주∙GM∙CJ의 국내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등 다수의 성공사례를 만들었다. 이후 디자인기업∙IT투자기업 경영을 거쳐 제일기획에 재입사하여 삼성휴대폰 글로벌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 등을 집행했고, 상하이∙키예프 법인장을 지냈다. 화장품기업의 중국 생산 거점을 만들고 판매, 사업을 총괄했다. 한중마케팅(주)를 창립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졸업, 노스웨스턴대 연수, 상하이외대 매체전파학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