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성 국제부장

2019년도 나흘 밖에 남지 않았다. 속절없이 흘러간 지난 시간에 미련을 두기 보다 새로운 마음가짐과 결심으로 경자년(庚子年) 쥐띠해 맞이를 준비할 때다.

세월이 흘러도 인기가 식지 않는 ‘새해 결심의 스테디셀러’ 중에는 다이어트, 금연 등과 함께 ‘영어 정복’도 있다. 발음과 문법 등 어느것 하나 우리말과 비슷한 점이 없는 영어를 1년만에 마스터한다는 건 쉬운 목표일 리 없다.

필자는 대학 졸업후 대기업 해외파트와 국내 양대 영자신문 기자생활을 거쳐 언론사 국제부장으로 일하는 지금까지 20년을 줄곧 영어를 사용하는 업무만 해왔다. 그렇다 해도 1회분의 칼럼으로 영어를 잘 하도록 도울 재주는 없다.

하지만 영어 학습에 관한 만연한 오해에서 벗어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하도록 도울 수는 있을 것 같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국제업무 현장에서 느낀 영어에 관한 네 가지 오해를 정리해 봤다.

①누구나 영어를 잘 할 필요는 없다 일상적으로 영어로 의사 소통해야 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그런데도 영어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이유는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과 관련 있다. 스마트폰과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이 국경의 장벽을 상당 부분 허물어 버렸고, 이로 인해 인터넷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정보가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정보의 절반 이상은 영어로 돼 있다. 영어가 단순히 미국말이나 영국말이 아닌 '국제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건 앞서가기 위해서는 트렌드를 빨리 파악해야 하는데, 영어로 된 정보를 검색하고 읽어 들이는 속도가 느리면 그만큼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와 자동차에서 제빵과 미용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트렌드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분야는 이제 없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SNS)의 세계적 인기도 영어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페이스북은 월 사용자가 2억 명이 넘는다. 영어로 읽고 쓰기에 불편함이 없으면 페이스북을 통해 여러 나라의 ‘페친(페이스북 친구)’들과 폭넓게 소통하며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②원어민처럼 말해야 영어를 잘 하는 것이다 원어민처럼 말할 수 있다면 굳이 말릴 이유는 없다. 그게 잘못된 목표라는 게 아니라 전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한국인은 모두 '한국어 원어민'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한국어를 매개로 이뤄지는 업무(기획, 섭외, 문서작성과 인터뷰 등)를 잘 하는 건 아니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은 원어민 같이 '빠다'냄새 나는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해야 '잘한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아무리 발음이 좋아도 논리적으로 대화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떨어진다면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한다고 보기 어렵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외국인이 원어민보다 영어를 잘 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③최첨단 인공지능(AI) 번역기가 등장하면 영어공부는 필요 없어진다. 많은 이들이 AI 기술에 거는 큰 기대 중 하나이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여행 중 길을 묻거나 상점에서 가격을 흥정하는 데 필요한 '서바이벌 영어' 정도라면 AI 번역기가 큰 도움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지만 비즈니스나 외교 협상 등 차원 높은 대화라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인간의 대화는 단순히 텍스트의 전달로 이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말도 처한 상황과 표정, 제스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매순간 AI 번역기로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인공지능(AI)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튜어트 러셀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 컴퓨터과학과 교수가 지난해 필자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를 참고로 덧붙인다.

"AI 번역기는 놀라운 발명품이지만 불어(당시 프랑스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회화 능력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AI 번역기에 의존하는 사람보다 비즈니스 파트너로 더 신뢰가 가지 않겠나. 외국어를 배우는 건 새로운 문화와 사고방식, 관습을 익히는 지름길이다. 내 아이들은 모두 최소 두 개 이상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미래에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믿는다."

④미국식(또는 영국식) 영어가 ‘정통’이다 미국식/영국식 영어도 지역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 방언과 엑센트(accent)들이 존재하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국제적인 마인드와는 거리가 있는 생각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영어는 ‘국제공용어’다. 필자가 영국 유학후 잠시 근무했던 중국 대기업의 공식 언어는 중국어가 아닌 영어였다. 인도식 영어를 알아듣기 어렵다고 해서 13억 인도 시장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국제공용어’로서의 영어를 잘 하려면 중국이나 인도, 일본식 액센트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