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회계법인의 파트너(회계법인에 출자한 임원급 직원) A씨는 12월 들어 은행 업무를 보느라 바빴다. 월급통장을 개설하고 주택담보대출을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비대면 계좌 개설의 시대라 월급통장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대출이 문제였다. A씨는 중도상환수수료까지 물면서 대출을 갈아타야 했기 때문에 대출 금리를 꼼꼼히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A씨는 "12월 들어 나처럼 은행 업무를 봐야 했던 파트너들이 많았다"면서 "일부는 퇴직연금까지 바꾸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삼정회계법인 파트너들이 일제히 월급통장 등 금융거래 대상을 바꿔야 했던 것은 내년에 처음 실시되는 감사인 주기적 지정제에 따라 18년이나 거래 관계를 맺었던 신한지주(055550)를 떠나보내고 KB금융(105560)지주를 새로 고객으로 맞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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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외부감사법과 내부 규정에 따라 회계법인 소속 파트너와 해당 감사팀 회계사들은 감사 대상 기업과 계약 관계를 맺으면 안된다.

삼정회계법인은 공식적으로 주거래은행 관계를 맺는 은행이 없었지만, 대부분 KB국민은행과 거래해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회계사들이 일제히 주거래은행을 바꿔야 했다. 파트너들이 정신없었다고 설명할 정도였다.

한 회계사는 "은행 거래는 물론이고, 최근 유행하는 구독경제는 모두 규제 대상"이라며 "다만 대다수 회계법인이 은행 거래 정도만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삼정회계법인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회계법인도 적지 않은 파트너들이 거래은행을 바꿔야 했다. 삼정회계법인이 내준 신한금융지주는 삼일회계법인이 맡게 됐고, 한영회계법인이 맡던 NH농협지주도 안진회계법인으로 떠났다. KB금융은 원래 한영회계법인에 배정됐으나 한영이 KB금융과 용역 컨설팅계약을 체결 중이라 어쩔 수 없이 반납해 삼정이 맡게 됐다.

내년에도 혼란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는 주기적 지정 대상이 아니었던 우리금융지주와 하나금융지주(086790)도 내년엔 지정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우리금융지주)은 안진과 16년째 감사 계약을 맺고 있고, 하나금융지주도 한영과 15년째 계약 중이다.

감사인 지정제는 상장회사나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대형 비상장 주식회사가 6년 연속 감사인을 자유 선임하면 이후 3년은 증권선물위원회가 감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감사인 독립성 확보와 감사 수수료 정상화를 위해 도입됐다.

파트너들은 거래 은행이 계속 바뀌는 상황을 염려하면서도, 아예 금융지주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게 더 걱정이라고 했다. 한 삼정회계법인 파트너는 "대형 금융회사 정도 되면 담당 본부가 전담하는데, 이 회사를 떠나보내면 이 본부는 아예 할 일을 잃게 된다"면서 "내부적으로 신한지주를 빼앗겼다가 가까스로 KB금융을 가져오게 돼 다행스러워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