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與: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세종실록에 남겨진 장영실에 관한 마지막 기록이다. 실록에 따르면, 장영실은 '안여사건'으로 곤장 80대형에 처해졌다. 이후 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생사 여부는 물론, 그의 수많은 발명품에 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이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
영화는 세종 24년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세종(한석규 분)이 탄 안여가 부서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부서진 안여 잔해 더미에서 나뒹굴다 일어난 세종의 표정에선 당혹감과 분노,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이 느껴진다.
이후 극은 본격적으로 세종과 장영실(최민식 분)의 이야기를 그린다. 세종 4년, 장영실은 관노 출신이지만 손재주를 인정받아 세종의 눈에 띄어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게 된다. 이에 세종은 장영실을 면천하고 품계를 내린다. 이어 세종과 장영실은 농업에 필수인 조선만의 절기를 관측하기 위해 천문 사업에 돌입한다. 장영실은 하늘의 별을 통해 시간을 읽어낼 수 있는 천문 기기 '혼천의'를 만들고 명나라와는 다른 새 절기 측정에 성공한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했다면 크게 새로운 건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종과 장영실은 단순한 군신(君臣) 관계를 뛰어넘는 '브로맨스'를 보여준다.
세종은 장영실을 "영실아"라고 부른다. 장영실은 세종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감동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세종이 장영실을 곁에 누이고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며 "(군주를 의미하는)북극성 옆의 작은 별이 네 별"이라고 말하는 모습은 멜로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세종이 한글 창제에 몰두하면서 두 사람의 '애정 전선(?)'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극의 중심인 안여사건의 배후나 장영실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도 두 사람의 끈끈하고 애틋한 관계가 바탕이 된다.
천문은 연기파 배우 한석규와 최민식의 만남만으로도 기대를 모은다. 두 사람은 영화 '넘버3(1997)'과 '쉬리(1999)' 이후 약 20년 만에 재회했다. 한석규와 최민식은 각각 세종과 장영실로 분해 마치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한 행동으로, 때로는 절절한 눈빛 연기로 아슬아슬하면서도 애틋한 두 사람의 관계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2011년 방영한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세종을 연기했던 한석규의 또 다른 세종을 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다.
여기에 영의정 역할의 신구, 문무대신을 맡은 김홍파, 허준호, 김태우를 비롯해 장영실의 동료로 등장하는 오광록, 김원해, 임원희 등 연기파 배우들의 감초 연기가 극에 생기를 더한다. 신분을 뛰어넘은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시기하고 세종보다 명나라의 눈치를 살피는 고관들의 모습은 답답하지만, 장영실의 동료들은 소소한 웃음 포인트로 숨을 트이게 한다.
천문은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덕혜옹주' 등을 연출한 허준호 감독이 3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허 감독은 인물의 감정 변화를 탁월하게 포착해 섬세한 심리 묘사를 그려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극 중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에 대해 "실록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것"이라며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관객들이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세종의 새로운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장영실의 놀라운 천재성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를 중점적으로 고민했다"고 말했다.
시대를 앞서간 두 천재는 오롯이 서로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한석규는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에 대해 "같은 꿈은 꾼 벗", 최민식은 "나를 알아준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무한한 애정"이라고 정의했다. 천문은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묵직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마치 한 편의 절절한 멜로 영화를 본 듯한 느낌도 든다. 다만 익숙한 서사인 만큼 색다른 이야기나 큰 반전을 기대한다면 다소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12월 26일 개봉. 12세 관람가. 132분. 롯데엔터테인먼트 배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