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가 F1(포뮬러원)과 함께 세계 양대(兩大) 자동차경주대회로 꼽히는 WRC(월드랠리챔피온십)에서 사상 첫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팀이 세계 최고의 레이싱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건 이번이 처음으로, 현대차가 1998년 처음 모터스포츠에 뛰어든 지 21년 만에 이룬 쾌거다.

올해 현대차는 WRC 전통 강자였던 시트로앵(3위)·포드(4위)뿐 아니라, 작년 우승컵을 거머쥔 신흥 강자 도요타(2위)를 18점 차이로 꺾고 총 380점으로 우승했다. 연간 1000억원 이상 WRC 팀 운영에 쏟아붓는 등 과감한 투자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현대차, 도요타 제치고 WRC 첫 우승 - 현대차가 F1(포뮬러원)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적 자동차경주 대회인 WRC(월드랠리챔피언십)에서 작년 우승팀인 도요타를 제치고 사상 처음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현대차가 모터스포츠에 진출한 지 21년 만에 이룬 쾌거다. 사진은 지난 8월 핀란드에서 열린 9차 랠리에서 현대차 팀이 달리는 모습.

F1이 한정된 공간의 경주트랙(서킷)에서 오로지 속도 경쟁을 한다면, WRC는 전 세계 산간 도로·진흙탕·자갈밭·눈길 등 실제 도로를 달리며 성능과 내구성을 동시에 겨룬다. 국내에선 F1에 비해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유럽·중남미에선 축구만큼 인기가 많다. 레이싱이 펼쳐지는 오지(奧地)로 직접 찾아가 관람하는 팬들도 많다. 현대차 관계자는 "F1이 순발력 싸움이라면, WRC는 천 길 낭떠러지 같은 전 세계 험지에서 '운전의 달인'들이 시속 100㎞ 이상의 속도로 차를 마음대로 갖고 노는 게임"이라며 "차량 성능·내구성이 뒷받침돼야 출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대차, WRC 좌절과 재도전

현대차의 우승 뒤에는 20년 전 눈물겨운 실패담이 있다. 현대차가 모터스포츠에 처음 도전한 건 1998년이다. 당시 WRC의 마이너리그인 '전륜구동 차량 대회'에 티뷰론으로 출전해 꼴찌에서 둘째(5위) 성적을 냈다. 1999년 같은 대회에선 2위까지 올라, 2000년 WRC 본대회(4륜구동)에 출전했다. 그러나 한 해 13회에 걸쳐 열린 대회에서 단 한 번도 3위 내(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2003년까지 4년 연속 트로피가 없자, 현대차는 WRC에서 철수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당시 차량 개발을 외주로 맡겼는데, 기술·노하우 공유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현대차의 밑천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스페인에서 열린 2019 WRC의 마지막(13차) 랠리에서 우승한 현대차 소속 티에리 누빌(오른쪽) 선수와 보조 드라이버 니콜라스 질술이 환호하고 있다.

현대차가 WRC 복귀를 선언한 것은 그 후 약 10년 만인 2012년이다. 자체 기술로 승부하겠다며 독일에 현대모터스포츠법인도 설립했다. 실제 WRC에 재도전한 건 2014년이다. 그해 말, BMW 고성능차 M의 책임자로 '세계 3대 고성능 차 전문가'로 꼽히던 알버트 비어만 사장(당시 부사장)도 영입했다. 비어만 사장을 삼고초려해 영입하고 거액의 투자를 결정한 건 정의선 수석부회장이다. 당시 회사 내부에선 "과연 가능할까" 하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정 부회장은 "현대차의 품질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려면 고성능 차로 입증해야 한다"며 밀어붙였다. 정 부회장은 종종 현대차 남양연구소 트랙을 찾아 개발 중인 차로 레이싱을 하는 등 고성능 차에 관심이 많다.

◇현대차 "기술력 입증"

비어만 사장을 태운 현대차 고성능 차의 실력은 급상승했다. 비어만 사장은 일반인에게 판매할 고성능 차 브랜드 N을 출범시켰고, 2017년 i30 N, 2018년 벨로스터 N을 출시했다. 현대차가 F1이 아니라 WRC를 택한 것도 고성능 차 기술을 양산차에 적용하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경주용 차 개발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F1과는 달리, WRC에선 양산차를 개조해 출전하기 때문에 고성능 차 기술을 일반 고객들이 타는 차에 접목하는 게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WRC는 "세계 최고의 차를 만들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을 달리는 대회"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번 WRC 우승으로 현대차의 기술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음이 입증됐다"며 "현대차의 브랜드 가치도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