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규명 안되고 시공·안전관리 여전히 ‘부실’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의 핵심 장비인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설에 연이어 불이 나고 있지만, 뚜렷한 원인 규명이나 재발 방지 대책이 나오지 못하면서 판매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재생에너지는 기상 여건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남는 전력을 저장해 발전량이 적을 때 송전하는 ESS 설비가 사실상 필수적이다.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늘리는 상황에서, 기껏 늘린 발전 설비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장비는 판매가 안되는 셈이다.

국내 대용량 ESS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LG화학(051910)삼성SDI(006400)는 지난달 말 3분기 실적 발표에서 올 7월 이후 국내에서 ESS용 배터리 판매 실적이 거의 없다고 밝혔다.

LG화학은 "올해 3분기까지 ESS용 배터리 국내 매출은 전무하다"며 연말까지 국내 ESS 매출이 거의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삼성SDI도 "올해 중대형 전지 부문은 지난해부터 반복된 ESS 화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삼성SDI의 경우 상반기 ESS용 배터리 국내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절반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제 거의 ‘제로’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양사 모두 전기차용 배터리 판매 호조로 전지사업부문 실적은 개선됐으나, ESS용 배터리는 해외에서만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 27일 김해 태양광발전설비 ESS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올 하반기 들어 ESS용 배터리 판매가 뚝 끊긴 것은 화재가 계속되는 데, 원인 규명이나 문제 해결이 확실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8월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국내 ESS 시설 화재는 총 28건이다. 이 가운데 5건은 지난 6월 정부가 ESS 안전강화 대책을 발표한 이후 발생한 것이다.

당초 올 하반기 반등을 노렸던 ESS 업계는 내년까지 수요 회복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원인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화재 가능성도 제대로 줄이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면 ESS 판매 중단 상황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LG화학과 삼성SDI의 경우 ESS용 배터리 매출이 전지사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15%에 불과해 사정이 낫다. ESS에 들어가는 전력변환장치(PCS) 등을 만드는 중소기업은 신규 수주가 끊겨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결국 업계가 자체적으로 화재 확산 방지 장치를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불이 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ESS 배터리와 장비가 타는 것만은 막겠다는 것이다. 삼성SDI는 약 2000억원을 투입해 전국 ESS 사업장에 특수 소화 시스템을 장착한 안전장치를 설치하고 있다. 권영노 삼성SDI 부사장은 "안전성 강화 대책을 실시하게 된 이유는 국내 ESS 산업이 자칫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LG화학도 조만간 화재 확산 방지 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하지만 화재 확산 방지 장치에 불과해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다. 또 ESS 설치 운영 과정에서 설계·시공·관리 결함 등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글로벌 품질인증·위험관리 회사인 ‘디엔브이 지엘’(DNV GL)은 10월 말 국내 보험회사의 의뢰로 ESS 화재 원인에 대한 심층 조사를 벌인 뒤 최근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서 DNV GL은 "고장을 일으키는 제조사의 작은 결함을 찾아냈으며 그밖에도 모니터링 및 화재 예방 시스템이 미흡해 작은 고장이 큰 화재로 확대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니콜라스 레논 아시아·태평양 지역 부사장은 "국제 안전기준과 한국 안전기준이 달라서 작은 오작동이 더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다"며 "한국 정부가 이미 현 안전규정을 검토하고 있지만 에너지저장장치 개발자들도 큰 화재 피해로 번질 수 있는 작은 고장을 막기 위한 모니터링 및 화재 예방 시스템을 만드는데 더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고 권고했다.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공격적으로 펴면서 정작 ESS 안전 관리 기준 등은 정하지 않아 화재 사고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6년 274개였던 ESS 설비는 3년 만에 1490개로 늘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 독일 등 해외에서는 ESS 사업장 운영을 전력망 설치, 운영 경험이 많은 업체가 담당하는데, 한국의 경우 비교적 경험이 적은 중소기업이 주로 맡아 운영이 매끄럽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ESS 설비의 배터리 역량과 안전만 강화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ESS 구성하는 여러 시스템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능력과 이에 대한 매뉴얼 등이 갖춰져야 한다"고 말했다.